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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 프리즘]송호근/'재벌 몰락'이 불안하십니까

입력 | 2000-11-07 18:53:00


나는 재벌의 거식증(巨食症)과 전근대적 소유구조가 낳는 폐단을 자주 비판하는 사람이다. 그런 까닭인지, 작년 8월 김대중대통령이 IMF사태의 종식을 알리고 재벌해체의 깃발을 들었을 때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었다. 물론, 재벌기업군의 분가(分家) 조치가 한국경제에 큰 파장을 몰고올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또는, 재벌기업이 제공하는 온갖 상품과 문명 이기(利器)에 풍덩 젖어 있던 한국 중산층 가정의 즐거움이 어느 날 갑자기 반감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면서, 나는 여전히 '현대자동차'를 타고 출근하고 '삼성휴대폰'으로 전화걸고 '삼성컴퓨터'로 온종일 연구하고 'SK주유소'에서 주유하고 'LG마트'에 잠시 들렀다가 가족이 기다리는 '대우아파트'로 돌아간다. 그걸 유지하기 위하여 내 월급의 절반 이상을 써왔다.

그런 생활은 알게 모르게 월급 이상의 의미를 우리에게 부여했다. 현대인 이 되는 것은 빈손으로 땅을 일궈 풍요한 생활을 만들어내는 개척정신을, 삼성가족 이 되는 것은 빈틈없는 합리성으로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경영정신을, 대우맨 이 되는 것은 황무지에 자본을 투자해 시장수요를 창출하는 징기스칸의 과감성을 심어주었다. 언제부터인지, 그런 경영술은 중산층이 가장 귀하게 받아들이는 생활신조로 수용됐으며, 재벌기업이 만든 상품에 붙어 있는 멋진 로고는 중산층의 정체성을 빛내는 중요한 브랜드가 됐다. 중산층의 전형에 해당하는 연봉 3500만원의 대기업 사원들의 꿈의 내부는 재벌기업의 로고로 상징되는 성취, 출세, 풍요의 가치로 뒤범벅돼 있다. 그들은 대학시절에 재벌을 비판하는 데모에 적극 가담했으며, 졸업과 동시에 몇백대 1의 경쟁을 뚫고 재벌기업의 뱃지를 단 사람들이다. 재벌에 대한 증오와 선망의 연장선 상에서 청장년기를 보낸 평범한 사람들은 재벌이 일상생활과 마음의 깊숙한 곳에 이미 들어와 있음을, 그리하여 정체성의 일부분이 됐음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한국과 같은 세속적 사회에서 종교 이상의 가치를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대우는 무너졌고, 현대는 몰락하고 있다. 대우가 붕괴했을 때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대의 몰락은 마치 뒷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한국 경제기적의 산증인이자 온갖 신화와 비화를 만들어낸 대표적 재벌이 휘청거린다고 해서가 아니다. 무작정 상경한 맨손의 청년이 일궈낸 경제기적에의 꿈이, 그것을 신조삼아 언젠가 자신도 해낼 것이라고 숨가쁘게 달려온 중산층의 코리안 드림 이 이제는 새롭게 기댈 곳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재벌기업은 과거의 그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시장의 명령은 준엄하다. 재벌의 몰락과 변신은 한국경제의 체질을 바꾸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는 이론적 진단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재벌기업의 몰락과 함께 중산층의 정체성도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취 출세 풍요의 꿈과 그것을 가능케 했던 독점 비리 탈세 정경유착에 대한 낡은 집념을 이제는 버려야 한다. 그리하여, 공허함 상실감 불안감이 재벌시대의 마감을 재촉하는 현대 의 몰락이 가져온 요즘의 사회심리다.

혹자는 이런 상태를 아노미 현상(무규범상태)으로 진단하기도 하겠지만, 그렇게까지 심각한 정도는 아닐 것으로 기대한다. 다만, 에릭 프롬의 날카로운 진단처럼, 안정을 구하기 위해 자유를 반납하는 이른바 자유로부터의 도피 가 발생할 위험은 있다. 재벌붕괴로 인한 갑작스런 실업 파산 연쇄부도 경기침체 시장불안 등등의 사회적 재앙을 버텨나갈 정신적 자산이 빈약한 사람들에게는 과거의 안정과 영화 를 찬양하는 보수주의자들의 공격이 호소력있게 들릴 것이다. 그 호소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민주주의는 위험에 처하고, 2차 구조조정은 다시 한번 실패로 끝날 개연성이 커진다. 1차 구조조정이 미완으로 끝난 이유도 정치인 관료 시민 할 것 없이 과거에 대한 집착과 변화에 대한 불안감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조조정은 경제 뿐만 아니라 의식과 정체성의 영역에도 동시에 진행돼야 한다. 경제의 구조조정이 정부의 몫이라면, 의식과 정체성의 구조조정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우선, 재벌 위주의 압축성장이 우리에게 강요했던 마음의 습관 을 하나하나 벗겨낼 일이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