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영화배우 최민수가 어느 대담에서 ‘식스 센스’의 어린 배우 할리 조엘 오스멘트를 보며 굉장히 걱정했다는 말을 했다. “어린 나이에, 아직 인성이 정해지지 않을 때 저런 연기를 하는 건 무서운 일”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도 그럴 것이 ‘식스 센스’로 올해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까지 올라간 이 어린 배우는 섬세한 연기로 영매(靈媒)인 소년의 공포와 혼란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한다.
최민수에겐 계속 가슴아플 일이지만, ‘식스 센스’이후 신비한 능력을 지닌 어린이는 미국 영화에서 하나의 유행이 되어버렸다. 올해 초 개봉된 ‘스터 오브 에코’에서도 어린 꼬마가 유령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특별한 수신인’으로 등장한다. 또 최근 개봉작 ‘블레스 더 차일드’에서 어린 소녀 코디는 어른들이 듣지 못하는 걸 듣고, 죽은 새를 되살리는 특별한 능력을 보여준다. ‘엑소시스트’ ‘오멘’ 등 20여년 전의 영화들에선 사탄의 자식으로 묘사됐던 ‘귀신들린 아이’가 요즘엔 영혼의 맺힌 한을 풀어주고 어른이 몰랐던 무언가를 가르쳐주는 신성한 역할로 변모했다. 그런데 자꾸 어린이를 신성화하는 어른들의 속셈은 뭘까.
프랑스 소설가 파스칼 브뤼크네르는 “19세기 루소 이후 광인과 예술인 어린아이 원시인을 동일한 차원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모두 문명의 영향으로 잃어버린 근원에 속해있는 자들이라는 의미에서다.
그의 주장에 기대어 비약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어린이를 신성화하는 요즘 영화들은 서구 영화에서 종종 보이는 동양에 대한 낭만적 동경과 비슷한 것 아닐까. 서구인들이 과거 자신들이 망쳐놓은 식민지 동양인들이 서구인보다 근원에 가까운 삶을 누리고 있다고 믿고 정신적 미래로 삼듯, 영화속 어린이들도 어른이 보지 못하는 비밀을 투명하게 포착하고 이를 전달해주는 역할로 미화된다.
한계를 깨닫고 터무니없는 꿈을 접으며 성장한 어른들은 이제 자신에게 없는 진실을 향한 통찰을 어린이에게 부여하고, 이를 짊어진 영화속 아이들은 괴롭다. 누구도 이해해주지 않는 자신의 특이함 때문에 괴로워하다 그 특이함에 집중함으로써 비로소 존재가 빛나는 영화속 신령한 어린이들은 제도 앞에 무기력한 어른들이 닮고 싶어하는 새로운 이상이 아닌지. 그래서인지 아기 예수와 오버랩되는 소녀 코디를 보호하기 위한 어른들의 사투가 펼쳐지던 영화 ‘블레스 더 차일드’가 영 유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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