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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포럼]김태길/문화의 뿌리에 물을 뿌리자

입력 | 2000-11-09 19:08:00


일찍부터 황허(黃河)유역에서 양쯔(揚子)강 일대에 이르는 중국땅의 중심부를 차지해 그곳에 국가를 세우고 문화를 일으킨 것은 한족(漢族)이었다. 따라서 역대 중국의 주권을 장악한 것도 한족이었으나 여기에도 예외가 있었다. 즉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의 침공을 받고 양쯔강 이남으로 쫓겨간 송(宋)을 무너뜨리고 원(元)나라를 세운 몽골족과 명나라를 타도하고 청(淸)나라를 세운 만주족의 경우가 그것이다.

원나라의 중국 통치 기간은 100년에 가까웠고 청나라의 그것은 300년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긴 식민지 시대에도 한족은 그들 문화의 주체성을 굳건히 지켰다. 한족의 유교사상과 한자문화의 뿌리가 튼튼했던 까닭에, 몽골족과 만주족은 중국의 국토는 점령했으나 그 문화까지 점령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역사에서 문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크며 그 수명이 얼마나 장구한가를 여실히 말해 준다.

요즈음 정부의 고관들이 문화정책을 말할 때, 문화의 꽃과 열매에 해당하는 공연예술과 영상예술 그리고 체육 등에만 열을 올리고, 문화에 뿌리에 해당하는 인문학과 기초과학 그리고 국민의 가치관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킨다. 돈벌이에 효자노릇을 하는 사람들은 ‘신지식인’으로서 찬양의 대상이고, 보이지 않는 문화의 뿌리를 가꾸고자 그늘에서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은 낡은 지식인으로 ‘퇴출’의 대상이다. 뿌리만 튼튼하면 꽃과 열매는 때를 기다려서 저절로 피고 달릴 것이며 뿌리가 마르거나 썩으면 꽃과 열매에도 내일이 없다는 평범한 사실을 모르는 것인지, 또는 애써 외면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문화의 뿌리 중에서도 가장 굵고 소중한 것은 국민의 가치관이요, 그 도덕성이다. 그 가장 굵고 소중한 뿌리가 병들고 썩어 가는 데도 우리는 그것을 치유하고 살리려는 진지한 노력을 게을리하고 있다. 기껏해야 땅위에 드러나서 잘 보이는 꽃과 잎과 열매의 병에 대해서만 소독약을 뿌리는 정도로 최선을 다한 것으로 착각하는 것일까? 진실로 한심하고 개탄스러운 현실 인식이다.

우리들을 위하여 가장 소중한 것은 마음 편안하고 건강한 삶을 사는 일이다. 마음 편안하고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질서와 평화가 앞서야 하고, 질서와 평화를 위해서는 사회적 갈등을 최소화해야 하며,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지나친 욕심을 자제하는 동시에 공동체와 타인에 대한 깊은 배려를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이 엄연한 상식을 크게 벗어나고 있다.

“국제적 경쟁력을 강화하여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말이 정당한 주장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을 벌어서 무엇에 쓸 것인지 그 목적에 관한 올바른 의식이 전제돼야 하며, 돈을 버는 데도 옳은 길과 그른 길의 구별이 있다는 분별이 함께 해야 한다. 그리고 많은 돈을 수단으로 삼고 이룩해야 할 올바른 목적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질서와 평화를 전제로 하는 마음 편안하고 건강한 삶이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경우에 개인적 호의호식과 사치스러운 삶을 위하여 돈을 사용하는 실정이다. 가치관이 혼란스럽고 가치체계가 물구나무를 서고 있는 형국이다.

가치체계의 혼란은 곧바로 도덕성의 타락으로 이어진다. 돈을 버는 데도 올바른 방법이 있음을 고려하지 않고 함부로 앞을 다투어 사기와 횡령 그리고 직권 남용 등 부정과 부패가 도처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 돈의 쓰임에 대한 슬기로운 목적의식이 없으므로, 돈을 너무 많이 가진 사람은 유흥과 사치의 길로 빠지고, 돈이 없는 사람들 가운데는 사회제도에 대한 불만이 분노로 이어져서 법을 무시한 범죄의 길로 타락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풍부한 경제력도 필요하고 적절한 무력도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더욱 근본적인 것은 건전하고 자랑스러운 문화를 가꾸는 일이다. 건전하고 자랑스러운 문화를 꽃피우기 위해서는 튼튼하고 질박한 문화의 뿌리부터 가꾸어야 하며, 문화의 뿌리 가운데서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람들의 가치관과 도덕성이다. 가치관과 도덕성에 대해 우리 모두가 깊이 반성하고 슬기롭게 행동해야 할 시점이다.

김 태 길(학술원 회원·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