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문턱에 서면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93년 칸영화제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마이크 리 감독의 다. 요즘 새벽녘에 쉽게 볼 수 있는 청회색 톤이 수시로 화면에 깔려설까. 아마도 이 맘 때면 어김 없이 불쑥 찾아오곤 하는 질문을 되새겨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거냐”고.
화면이 열리면 도시의 칙칙한 밤 뒷골목에서 여성의 숨가쁜 교성이 들려온다. 남자가 대체 어떻게 했는지 교성은 이내 분노에 찬 욕설로 바뀐다. 여성이 달아나자 사내는 그 길로 차를 훔쳐 타고 가로등 점점이 박혀 있는 고속도로를 달린다. 이때부터 두 시간 넘게 관객은 이 사내의 방랑 아니 방황을 지켜봐야 한다.
영화는 고향 맨체스터를 말 없이 떠난 여자 친구 루이즈를 찾아 런던으로 간 조니(데이비드 툴리스)의 행적을 좇는다. 감독은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엔 그다지 관심이 없다. 조니가 런던에서 만나는 사람과의 에피소드를 이렇다 할 플롯 없이 이어갈 따름이다.
카메라가 호머의 오딧세이 책 표지를 슬쩍 비춰주는 걸로 봐서 감독은 조니를 현대판 오딧세이쯤으로 설정한 것 같다. 그렇다고 조니가 영웅신화의 이야기 틀을 따라가는 건 아니다. 특별한 인연도, 뚜렷한 목적도 없이 마주치게 되는 사람들과 짧지만 상징적인 에피소드를 만들어갈 뿐이다.
물론 조니는 영웅과 거리가 먼 존재다. 27세의 껑충한 이 총각은 꾀죄죄한 차림새에 직업도 없고, 욕정 없는 메마르고 변태적인 섹스를 아무 여자와 하고, 더러 마약까지 한다. 문제는 조니가 함부로 몸을 굴리는 부랑아긴 하지만 시도때도 없이 책을 읽고, 철학적인 언설을 늘어놓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조니가 만나는 사람 역시 자기 모순과 소외에 절어있는 인물들이다. 마약과 섹스 없이는 세상을 견뎌내지 못할 것 같은, 루이즈의 룸메이트. 스코틀랜드에서 굴러온, 철 없는 20대 욕쟁이 부랑아 커플. 삶과 존재에 대한 철학적 확신을 갖고 있지만 육욕은 어쩌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건물 경비원. 그 경비원이 밤마다 창 너머로 훔쳐보는 건너편 건물의 외로운 중년 여자.
비록 비중 있게 그려지진 않지만 내성적이다 못해 정신적으로 약간 이상한 카페 여 종업원, 늙는 걸 못참아 40세가 되는 날 자살하겠다며 여자 사냥과 돈지랄을 해대는 부자집 망나니 청년. 정리정돈이 인생의 목표인양 강박적으로 깔끔을 떠는 간호사 역시 온전치 못한 인간들이다.
도저히 한 울타리 안에 모을 수 없는 사람들이지만 이들은 현대사회, 엄밀하게 말해서, 대처리즘의 우울한 망령과 세기말의 근거 없는 불안이 기승을 부리던 1990년대 영국사회의 자화상을 반영하는 존재들이다.
조니는 이 사람들을 만나면서 세상과 인생과 인간에 대한 절망과 회의와 저주를 속사포처럼 쏟아놓는다. “인생은 한번도 행복하지 못한 채 지나간다”거나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인생은 끝나는 것이고 그렇게 우리는 죽어간다”는 것이다. 악의 복음을 전하러 세상에 온 사탄처럼 조니는 “하나님은 악이며 당신을 증오한다”면서 “이 세상은 악마가 꾸민 대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그의 말을 총합하면 “인생은 쓰디쓴 독약”이다.
조니의 독설과 방황으로 점철되는 는 사실 마이크 리가 비판적으로 다뤄온 영국 하층민의 고통스런 삶을 바탕에 깔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인간의 실존적 고독에 더 천착한다. 세상의 원리를 훤히 아는 인물 조니를 통해 사유의 체계는 가능할지언정 삶의 체계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키에르케고르의 언술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그야말로 헐벗은(naked) 영혼의 고독한 몸부림을 있는 그대로(naked) 보여준다고나 할까.
는 종말론적 메시지가 지금 듣기엔 어색하고, 마음만 먹으면 어떤 여자든 후릴 수 있는 조니의 탁월한 능력이 마뜩치 않은 영화다. 책으로만 세상을 알아버린 주인공 조니도 이성적으로 빚어낸 인물이어서 정이 덜 가는 캐릭터다.
그러나 빛의 명암을 맘대로 주물러대는 촬영감독의 솜씨 덕에 영혼까지 춥게 만드는 화면을 만날 수 있고 저음으로 퉁기는 첼로 음 속에서 방점처럼 찍히는 청명한 하프음이 정수리를 쿡쿡 찔러대는 좋은 영화다.
사족:라스트 장면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청회색 톤이 대기를 감싼 새벽녘 조니가 지난 밤 고향으로 함께 돌아가자고 약속한 루이스를 남겨둔 채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면서 황량한 도로를 걸어간다. 거기서 언제까지고 절름거릴 내 영혼의 행보를 보게됐으니까, 빌어먹을.
김태수 ts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