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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프리즘]차병직/司正으로는 한계 있다

입력 | 2000-11-14 17:17:00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법대 강사와 상하원 의원을 지낸 다음 왕실 고문변호사가 되었고, 마지막에는 대법관의 지위에 올랐다. 이것이 프란시스 베이컨의 추락 직전까지의 화려한 약력이다.

1621년 재판을 받던 오브레이와 애거튼이 사건에 대한 청탁을 하면서 베이컨 대법관에게 100파운드와 400파운드의 돈을 주었다고 진술했다. 베이컨은 모함이라고 반박했다. 제임스 1세로부터 재판권을 얻어낸 상원과 하원은 부정한 뇌물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겠다고 나섰다. 그 위세에 눌려 베이컨은 자백할 수밖에 없었다. 수백 파운드의 돈과 금단추를 선물로 받고 이자 없이 많은 돈을 빌린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 하인들이 받았다고 변명했다. 결국 베이컨은 벌금형과 징역형을 함께 선고받고 런던탑에 갇혔다. 베이컨의 추락도 선물과 뇌물을 엄격히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위의 높낮음을 막론하고 공무원 세계의 부정한 뇌물거래는 17세기 영국에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선물과 뇌물의 경계에서 부정이 싹트고, 그 부정이 사회의 부패로 확산되고, 부패가 곪아 터지면 적당히 상처를 남기고 수습하는 악순환은 고대로부터 지금가지 세계 도처에서 되풀이돼 왔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부정부패의 상처가 곪은 상태의 사회에서 지내기란 괴로운 일이다. 그런 바탕에서는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위한 개혁도 무망해 보인다. 정부의 단호한 결정은 제대로 먹혀들지 않고, 국민의 가슴엔 부의 축적을 위한 비정상적 수단 하나쯤 마련하지 못하면 소외되고 도태되는 듯한 이상심리가 자리잡는다. 모든 인류가 맑은 사회에서 살기를 바라는 것 같아도, 정작 사회가 혼탁해지면 자신의 호흡기에 앉는 먼지에는 둔감해지는 법이다.

우리도 지금 그 상처의 가운데 서있다. 한빛은행과 동방금고의 부정대출, 그것을 감독해야 할 금융감독원의 비행적 관련, 청와대 청소원의 사칭과 갈취. 이 정도는 근년 우리 사회의 만연된 혼탁사에 비춰보면 새삼스런 것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구조조정의 아픔과 무섭게 짓누르는 경제 위기감 속에서는 예사롭지 않게 보일 수 있다.

사태의 심각성은 여권 핵심인사가 했다는 어떻게 할 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대로는 안된다는 것이다 라는 말에 잘 드러나 있다. 하지만 여권은 즉각 어떻게 해보겠다고 나섰다. 공무원에 대한 사정작업을 하겠다는 것이다. 청와대 직원들에 대한 감찰에 착수했고, 범위를 넓혀갈 것이란다. 이틀 뒤에는 대통령이 직접 나섰다. 정부로서는 이번이 마지막 결전 이라 생각하고 검찰 경찰 감사원을 총동원해 비리를 척결하겠다고 선언했다. 아울러 미뤄둔 반부패기본법과 자금세탁방지법도 처리할 뜻을 내비쳤으며, 반부패특별위원회를 격상해 상설화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마치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듯하다.

그러나 기분은 흔쾌하지가 않다. 그것으로 될까라는 조소적 의구심보다는, 그것이 "근본적인 방법일까"하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과거 범죄와의 전쟁이 공포탄에 그쳤듯이, 공권력을 수단으로 한 강력한 의지의 표현은 일시적 효과를 기대하기에도 미진하다. 검찰이 정부의 뜻대로 움직여 줄지도 의문이다. 설사 검찰권을 도구로 삼아 정치적 사정을 단행한다고 해도, 법원에선 납득할 수준으로 처벌이 될까 걱정된다.

전쟁의 대상인 부패는 남의 옷에 묻은 티끌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그 혼란의 한가운데 있고, 사정의 주체도 그 썩은 연못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정이란 불가피한 경우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사후약방문이다. 그리고 사정의 회오리가 지나가면 살아남은 독버섯의 싹은 다시 움튼다.

선물과 뇌물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돈의 흐름을 투명하게 해 검은 돈의 세탁을 막고, 발견된 비리는 엄단하자는 부패방지법안에 그 많은 의원이 서명한 지 몇년이 지났는가.

단호한 사정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고 뒤늦게나마 부패척결에 대한 정부의 고뇌를 탓하자고만 하는 것은 아니다. 상한 고기를 골라내는 것보다 썩은 물을 정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대통령부터 전공무원과 국민의 양심을 움직일 수 있는 솔직한 고백과 행동을 보이는 것이 오히려 필요하지 않을까.

차병직(변호사·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