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서해안의 주꾸미철이요, 가을은 남해안의 전어철이다. 또는 봄은 서해 칠산의 조구(조기) 둠벙이요, 가을은 망덕포구의 전어(箭魚) 둠벙이란 말이 있다.
가을의 별미를 알리는 시절 음식으로는 전어회나 전어구이를 따를 만한 것이 없다. 그 달보드레하고 고솜한 맛, 입 속에서 아삭아삭 씹히는 맛. 전어구이는 숭숭 칼집을 내어 막소금을 뿌리고 노릇노릇 구워낸 것이 일품이요, 전어회는 나박나박 썬 다음 배와 무생채, 풋고추와 미나리채를 무침으로 버무린 것이 최상의 맛이다. 여기에다 가전비법(家傳秘法)으로 전해오는 식초를 얹으면 최상의 궁합이다. 달보드레하고 달짝지근하고 고솜한 맛이, 또는 혀끝이 얼얼하고 상큼한 맛이 다른 음식에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별미다. 그 맛이 외피감각과 내피감각을 동시에 흔들어준다.
그래서 망덕포구의 외망덕과 안망덕 2km의 외통수길에 다닥다닥 붙은 횟집들의 부뚜막에선 왱병(촛병)이 운다. 그러나 실제로 망덕포구에 와보면 이런 맥들은 끊겨 있다. 화학식초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지리산 자락을 에돌아 마지막 달려온 섬진강물이 남해로 수그러드는 그 합수머리 ‘들물횟집’도 그렇고 맨 아래쪽의 배알도(拜謁島) 앞에 있는 ‘배알도횟집’도 그렇고, 그 옆집의 내가 잘 들락거리는 ‘나룻터횟집’(전남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 외망덕, 061-772-2217)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구차스럽고 힘들게 살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화학식초만으로도 맛을 내는 데는 별 손색이 없다는 데야 할 말이 따로 없다.
이렇게 해서 맥이 끊긴 게 ‘밥도둑’이라 일컫는 전어 ‘밤젓’이다. 전어구이보다, 전어회보다 달보드레하고 쌉싸래한 맛을 내는 것은 그 밤젓인데 동해안 서해안을 휩쓸고 다녀도 이 밤젓은 구할 데가 없다. 밤젓 달라면 전어창젓(돔배젓)을 내놓고 이게 밤젓이라고 우기는 데는 또 할 말이 없다. 밤젓이란 전어창 중에서 밤톨(돌기)만을 따내어 담그는 젓을 말한다. 자세히 설명을 곁들이면 그 거추장스런 짓을 누가 하느냐고 우격다짐이다.
◇'아삭아삭' 가을 입맛이여
그러나 그 밤톨기 한 숟가락을 듬뿍 떠 햅쌀밥에 비비면 혀에 감치는 그 그로테스크한 맛이라니! ‘서울 사람들, 봄배젓은 알아도 밤젓은 모른다’는 말은 쉬쉬하며 떠도는 남도의 식담이다. 모르긴 해도 이 밤젓이 깡통 속으로 들어가면 무값일 터이다. 우리 밥상을 지켜낸다는 것은 얼마나 더디고 힘겨운 싸움인가. 이것이 곧 풍류 속에 들어 있는 검약과 절제의 정신이다. 이 정신이 퓨전 식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 민족혼도 민족정서도 죽는다.
광양제철이 들어서기 전만 해도 이 긴 물목의 포구는 백합 민물장어(뱀장어) 전어의 집산지였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식민지 시대엔 민물장어 하나로 ‘야마모토’(山本) 재벌을 형성한 물목이었다. 우나기(뱀장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일본인들에게 이 물목은 그만큼 부러움을 샀다. 당시에 만톤급 배를 세 척이나 거느렸다면 야마모토의 위력을 가히 알 만하다. ‘진월에 와서 돈 자랑 마라’고 했다던가, 호우 때 지리산 벌목의 통나무들이 떠내려와 이곳 태인도 갯벌에 처박히면 김(감태·甘苔)이 주렁주렁 달려 우리나라 최초의 김(金씨가 살아서 김이란 명칭이 왔다고 함) 시배지로도 알려져 있는 곳이다.
산본아 산본아
돈 자랑 마라
장엇배 끈 떨어지면
너나 내나 같은 신세란다
‘아리랑’이나 ‘강강술래’ 속에 지금도 살아 있는 노래다. 풍류현장이 아직도 살아 있는 곳, 섬진강 500리 물길이 이곳에 와 마지막 잠기고 가을 전어가 오르면 ‘전어축제’가 열리는 현장, 이 가을엔 지리산 안통을 휘둘러 마지막으로 이곳에 와 여장을 풀어볼 만도 하지 않은가. ‘자산어보’(玆山魚譜)에 이르되 ‘큰 놈은 한 자 정도로… 기름이 많고 달콤하다. 간혹 흑산에도 나타나나 그 맛이 육지 가까운 데 것만은 못하다’ 했는데, 이곳 망덕산 ‘전어 둠벙’이야말로 최상의 가을 입맛이 아니겠는가.
송수권(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