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를 졸업한 지도 어언 10년이 넘었다. 그 시절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성장기라고 하기엔 그다지 성장한 것 같진 않고(몸만 커졌다), 인생의 공백기라고 방치하기엔 너무 마음이 아프다. 분명 우리 인생의 한 부분이지만 왠지 특별하게 여겨지는 '하이틴'의 시기. 수많은 영화들은 그때를 비극 혹은 희극으로, 멜로 혹은 호러로 활용했다.
하이틴 영화라는 단일한 이름으로 부르긴 하지만, 우리나라와 태평양 건너의 사정은 많이 다르다. 우리가 목격하는 미국 고등학생들의 삶은 언제나 부러움의 대상일 수 밖에 없다. 에너지가 넘쳐흐르고, 미식축구와 치어 리더가 등장하며, 졸업파티의 파트너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자기 차를 몰고 등교하는 그들 앞에선 왠지 기가 죽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풍요 속의 빈곤? 를 보면 그 아이들에게 주어진 물질적 혜택 뒤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있다.
이 영화에 나오는 고등학생 세 명의 공통점은 정신적 공황이다. 케빈 스페이시의 딸 도라 버치는 가슴 확대 수술을 위해 돈을 모으고, 그의 남자친구 웨스 벤틀리는 떠다니는 비닐봉지를 캠코더에 담거나 마약을 판매한다. 친구의 아버지에게 유혹당하는(혹은 유혹하는) 미나 수바리는 공허한 마네킹일 뿐이다. 이 영화는 굳이 '어른 세대와의 갈등' 같은 케케묵은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각 세대는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붕괴되어 있으며, 서로 이용하고 최대한 단절을 꾀한다. 결국 그들은 가치관의 무중력 상태에 빠지거나 먼 곳으로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하지만, 밖에는 억수같은 비가 쏟아지고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할리우드 틴에이저 영화는 대부분 의 혈기왕성한 아이들처럼 모든 것을 먹어치울 기세다. 그 시기가 얼마나 좋으면 의 드류 배리모어는 잠입 르포 기사를 쓴다는 핑계로 학창 시절 괴로운 '왕따' 경험에도 불구하고 다시 고등학교에 입학했을까? 하지만 다행히 그녀의 두 번째 학창시절은 성공적이었고, 국어 선생님과 사랑을 이루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는다.
존 세일즈 감독의 는 학창생활 이후에까지 관심을 연장한다. 달콤하게 시작했다가 현실의 냉혹함으로 치닫는 이 영화의 주인공은 새침떼기 여고생(배우 지망생)과 허우대 좋은 '느끼남'(가수 지망생)이다. 둘은 사랑에 빠지지만 졸업식이 다가오고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막상 부딪힌 세상은? 시련만 있다. 희귀한 하이틴 영화인 는 보수적인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 레이건의 대기업 중심 경제정책) 시대의 청춘에게 희망 따위는 없다고 은근하지만 섬뜩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물론 우리에게도 하이틴 영화는 있다. 암울했던 70년대 말, 현실을 왜곡함으로써 즐거움을 주었던 '얄개 영화'를 기억하는지. 지금은 수다쟁이 아줌마가 된 임예진은 이덕화와 짝을 이뤄 청순가련형 소녀를 연기했다. 하지만 거짓말은 오래 가지 못한다. 얄개 영화는 그 억압의 시대에 '눈 가리고 아웅'이었을 뿐이다.
90년대 들어 우리의 고등학교는 핏빛으로 물든다. 는 입시 제도에 대해 처음으로 정식 문제제기를 한 영화다. 공부도 잘하고 인기도 좋으며 예쁘기까지 한 은주(이미연)는 서울대학교 이데올로기 앞에서 좌절한다. 국문과나 사학과에 가고 싶은 은주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고, 그 아이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유서 한 장을 남긴 채 저 세상으로 간다.
의 아이들은 신경쇠약에 빠지고, 의 그 녀석은 폭주족이 되며, 의 여고생은 친구 하나를 찾아 몇 년 씩 구천에서 떠돈다. 그러나 졸업을 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임순례 감독의 를 보면 그 아이들을 기다리는 건 폭력적인 현실 뿐이다.
너무 암울한 얘기만 늘어놓은 것일까? 그렇다면 키타노 다케시의 에 나오는 두 문제아 신지와 마짱은 어떤가. 그들의 이야기는 커다란 울림을 준다. 도저히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문제만 일으키는 두 아이. 그들은 무슨 일을 해도 꼬일 뿐이다. 졸업 후에 자신의 길을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 역시 아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신지와 마짱. 그 아이들이 주고받는 두 마디. "우린 이제 다 끝난 걸까?" "바보, 아직 시작도 안 했잖아."
(사족)고등학생 여러분, 수능시험 치르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혹시나 시험 망쳤다고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아직 시작도 안 했습니다. 인생이 그렇게 만만하지만은 않지만, 열심히 해도 잘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아직 기회가 많다는 건 좋은 징조입니다.
김형석(영화 칼럼리스트)woodym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