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검찰 수뇌부 탄핵 문제로 파행을 겪고 있어 내년도 예산심의가 언제 본격적으로 시작될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상태이긴 하다. 그러나 한 국가의 예산은 그 나라의 살림살이에 대한 총체적 계획표임은 물론 향후 경제정책의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매년 개최되는 9월의 정기국회를 예산국회라고 하는 것도 예산의 중차대함에서 연유한다.
정부가 발표한 우리나라의 국가채무는 6월 말 현재 약 114조원으로 작년 말보다 6조원 이상 늘어나 국민 1인당 직접 채무규모는 약 250만원에 이른다. 이와 함께 금융구조조정에 투입한 공적자금처럼 정부가 지급보증을 선 보증채무는 작년 말 현재 81조5000억원에 이른다. 정부가 올 정기국회에서 40조원의 공적자금을 추가 조성하면 보증채무액은 120조원대로 늘어나고 국민 1인당 보증채무도 26만원에 이르게 된다.
외환위기를 겪기 전까지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재정이 건전하고 국가채무 규모가 적었던 몇 안되는 국가의 하나였다. 외환위기의 급한 불을 끄고 우리 경제가 미흡하나마 회복국면에 접어들 수 있었던 것도 그동안 우리가 보유해온 건전재정이란 보배로운 자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재정적자가 한번 누적되기 시작하면 정부의 지속적이고 강력한 노력 없이는 국가채무가 수그러들지 않는 속성이 있으므로 체계적인 중장기 계획 아래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끊임없는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2003년 균형재정을 달성하고 2004년부터 국채를 상환하기 시작해 10년 후인 2014년경에 외환위기 이전인 96년의 부채 규모 수준으로 회복한다는 것이다. 이는 2004년까지 평균 8%의 경상성장률과 이보다 낮은 5∼6% 수준의 재정규모 증가율을 기본 전제로 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전제가 과연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한가에 달려 있다.
최근 우리 경제는 개혁 분위기의 이완과 금융불안감에 따른 신용경색, 예상치 못한 고유가의 장기화로 실물경제의 위축이 거시지표로 나타나고 있는 상황보다 훨씬 심각하다. 문제를 더욱 어렵게 하는 것은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3개국의 통화불안사태가 지속되는 가운데 남미의 아르헨티나까지 국제통화기금(IMF) 긴급자금 수혈의 초읽기에 들어가는 등 국제금융시장 및 대외실물경제 환경의 불안은 한층 가중되고 있다.
대내외 경제상황의 급속한 악화를 감안할 때 기업 및 금융부문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사회간접자본 및 성장잠재력 확충을 중심으로 하는 경기 부양책을 신중히 검토해야만 하는 단계에 이르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미국 스탠퍼드대 스티그리츠 교수도 기업 금융 부문의 성공적 구조조정을 위해서는 경기활성화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국회에 상정된 내년도 예산안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균형예산의 달성과 경기활성화란 상충된 목표를 어떻게 조화롭게 달성할 수 있느냐에 관한 심도 있는 논의가 무엇보다 선행돼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불요불급한 지출수요의 억제는 물론이고 국방비 지방교부세 인건비 국채이자 등 경직성 경비의 과감한 절감으로 경기활성화 재원으로 전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 강구돼야 한다. 둘째, 기금재정의 폭넓은 개혁과 함께 ‘재정건전화 특별법’의 재정 및 예산편성의 ‘톱다운(top―down)’ 방식으로의 전환 등 새로운 재정운영시스템의 도입이 가능할 수 있도록 뒷받침돼야 한다. 셋째, 공적자금을 비롯한 정부보증채무의 운용현황 및 회수가능비율, 4대 공적연금을 중심으로 하는 4대 사회보험의 재정수지 현황 및 기금 운용현황 등을 정례적으로 발표케 함으로써 균형재정으로의 복원에 일익을 담당하게 하고 정부의 개혁의지에 대한 신뢰감을 제고해야 한다. 특히 공적자금에 대한 성공적인 국정조사는 정부채무의 절감은 물론 이자부담 경감을 통한 예산의 경직성 완화에도 일조할 것이다.
눈앞의 이해관계에 초연할 수 있고 개혁의 시련을 감내할 수 있는 국민만이 개혁의 값진 대가를 장기간에 걸쳐 향유할 수 있음을 모든 국민이 자각할 시점인 것 같다.
이만우(고려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