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급격히 조직화 장기화되고 있는 집단시위는 이해집단간의 다툼을 넘어 우리 사회의 건강한 가치관이 급격히 붕괴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라는 점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동계투쟁’을 함께 벌이기로 의견을 모아가는가 하면 농민 수만명이 21일 전국 100여 곳에서 동시에 집회를 갖고 고속도로까지 점거하면서 ‘농가부채 상환유예’를 주장하는 등 현정부 들어 전례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그밖에도 사회 각분야에서 의약분업 논란과 같은 크고 작은 집단시위와 단체행동이 꼬리를 물고 있다.
이같은 행동은 물리력에 의존한 ‘집단이기주의’와 ‘밥그릇싸움’이라는 일면을 깔고 있어 그 행동방식이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지만 최근 ‘구조조정 원칙의 실종’ ‘정부가 자초한 신뢰 상실’ 등이 이를 부채질한다는 지적이 뒤따르고 있다.
▼원칙이 사라졌다▼
국민 일반의 불신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이 사회에서 원칙이 사라졌다’는 대목이다. 또 집권측과 정부가 선거에서 지나치게 득표만 의식하는 등 대중영합적 인기주의(Populism)에 사로잡혀 원칙 허물기를 선도해왔다는 것이다.
펀드평가회사 스탁투펀즈의 박광택전무는 “현정권 창출의 기반이 된 노동자 농민의 집단행동 밑바닥에서 ‘생존권 수호’의 절박한 외침과 함께 ‘지도층은 원칙을 지키지 않는데 왜 우리만 고통을 져야 하느냐’는 항변을 읽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 항변은 예컨대 회계장부를 분식해 수십조원을 빼돌리고 회사돈을 쌈짓돈처럼 쓴 김우중 회장은 아직 건재한데 왜 대통령까지 나서서 부실의 최종책임을 대우 노동자들에게 강요하느냐는 것이고, 현대그룹이 아무리 중요한 기업이더라도 그 회생이 다른 기업의 경우와 형평에 맞느냐는 것 등이다.
또 인하대 홍득표(洪得杓·정치학)교수도 “금융당국이 기업과 유착한 것이 밝혀진 상황에서 공적자금 110조원 투입 이후 40조원이 더 필요하다고 할 때 노동자들에게 실업을, 농민들에게 빚을 감수하라고 설득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연세대 이종수(李鍾秀·행정학)교수는 “한빛은행 불법대출 및 정현준게이트 처리에 나타난 정부의 편향된 태도도 국민이 등을 돌리게 만든 주요요인”이라며 “한쪽에만 고통감내를 요구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룰이 깨져선 안된다▼
이같은 지적들이 모든 집단행동에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공기업의 구조조정 저항 등과 같은 전형적인 집단이기주의는 ‘개혁에의 걸림돌’이자 ‘창조적 파괴에 대한 저해’라는 점에서 당연히 타기되어야 한다는 지적들이다.
현재의 집단저항 움직임을 보면서 그 저변에 있는 ‘목소리 없는 다수’들의 상대적 박탈감과 그들의 분노를 눈여겨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한 노동전문가는 “두 노총을 합쳐 조직률이 12%밖에 안되는 현재 노동계의 흐름을 설득해내지 못하면서 나머지는 그냥 따라오리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라며 “한발 나아가 자영업자와 일용직 근로자 등 1000만명에 육박하는 ‘비조직적 집단’의 기류가 심상치 않다”고 소개했다. 공적자금 40조원 추가조성 등을 지켜보며 조세저항의 기류마저 있다는 것.
▼해법을 찾자▼
작금의 위기상황을 극복하고 앞으로도 수년간 계속될 우리 사회의 산업재편기를 슬기롭게 넘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부가 ‘합리적 원칙은 반드시 지킨다’는 신뢰감을 심어줘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그렇지 않을 경우 목소리를 낮추던 이익집단까지 일시에 자기몫을 주장하고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사회붕괴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연세대 유석춘(柳錫春·사회학)교수는 “각종 갈등조정 과정에서 정부의 모습은 한마디로 ‘대중영합주의’였다”며 “일단 원칙이 세워지면 끝까지 밀고나가는 자세가 신뢰회복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공정한 중재자’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단국대 강명헌(姜明憲·경제학)교수는 “개혁이 피할 수 없는 소명이라면 고통을 공평하게 나누기 위해 정부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그것이 ‘정의’의 출발점이라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