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 교과서를 보면 패권정당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공산당처럼 일당체제는 아니지만 경쟁은 형식에 불과하고 계속 집권해온 정당을 말하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 멕시코의 제도혁명당(PRI)이 지목됩니다. 그 이름이 보여주듯이 멕시코혁명의 적자로 탄생해 혁명의 성과를 제도화하기 위해 성립됐지만 부정부패의 대명사로 전락해 버린 이 제도혁명당이 무려 71년만에 권력을 내놓게 되었습니다. 12월 1일이면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야당인 국민행동당의 비센테 폭스 당선자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때문입니다.
▼경제 완전히 미국에 예속▼
김대중 정부 출범 후 최초의 정권교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지만 사실 한국의 경우 평화적인 여야간의 정권교체가 처음이었다는 것이고 정권교체는 여러번 있었습니다. 4·19 혁명, 5·16 쿠데타, 12·12 군사반란에 의한 정권교체 등이 그 예입니다. 그러나 멕시코는 제도혁명당 출범 이후 71년간 평화적이든, 아니든 여야간의 정권교체가 한번도 없었습니다. 사실 일당 지배하면 대부분 공산당을 연상하지만 대부분의 공산당이 1945년 이후 집권한 점을 감안하면 일당 지배의 역사는 멕시코가 한 수 위입니다. 가장 장기집권을 한 옛 소련 공산당도 집권기간이 제도혁명당과 비슷한 70여년 수준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세계에서 가장 오랜 일당 지배의 역사가 끝나는 것입니다.
최근 다녀온 멕시코의 분위기는 양면적입니다. 역사적인 정권교체가 멕시코 민주주의를 한 단계 발전시킬 것이라는 엄청난 기대와 함께 지난 70여년 동안 코포라티즘(조합주의)으로 불리는 일종의 ‘주고받기’를 통해 사회 구석구석을 장악해온 제도혁명당의 바다에서 새 정권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국정을 운영해 갈 것인가에 대한 불안도 적지 않습니다.
동시에 서민들은 정권교체도 정권교체지만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체결로 상징되는 경제개방, 외환위기와 국제통화기금(IMF)체제의 결과로 심화하고 있는 사회적 양극화, 이에 따른 생활고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사실 김대중정부는 집권 초기 IMF체제에 대한 비판적 여론에 대해 멕시코를 IMF체제를 통한 위기극복의 예로 선전했지만 멕시코는 결코 성공적인 예가 아닙니다. 즉 IMF체제 이후 멕시코는 완전히 미국의 예속경제가 되고 말았고 사회의 양극화로 절대다수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 결과 멕시코는 산간 벽지의 게릴라전에서도 인터넷으로 주옥같은 글을 써대서 ‘인터넷 시대의 혁명가’로 각광받는 마르코스가 이끄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의 무장봉기까지 겪고 있습니다.
▼경제정책 근본 재검토 절실▼
이같은 멕시코의 경험, 그리고 위험수위를 넘어선 해외자본의 경제지배와 사회적 양극화라는 우리의 현실, 나아가 정부의 IMF체제 완전극복 선언 후 다시 찾아온 경제위기를 고려할 때, 경제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합니다.
이에 못지 않게 시사적인 것은 최근의 촌극입니다. 전임대통령(1988∼94)인 카를로스 살리나스는 정권교체에 맞춰 망명에서 돌아와 회고록을 출간하며 명예회복을 노렸습니다. 경제철학에서 김대통령과 유사한 시장경제론자인 그는 NAFTA를 체결하고 민영화를 강행하는 등 소위 경제개혁을 추진했지만 임기말에 동생이 정적을 암살하고 거액의 돈을 빼돌린 것으로 밝혀지고 임기 직후에 외환위기가 터져 여론의 비판속에 해외로 떠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회고록에서 경제위기는 자신이 아니라 후임인 현 에르네스토 세디요대통령이 잘못해 터진 것이고 동생의 관련 사건도 정치적 음모라고 반박했습니다. 이 점에서 경제위기가 임기말에 터졌느냐, 임기 직후에 터졌느냐는 차이는 있지만 경제위기의 책임공방이나 이를 통한 명예회복 노력 등에서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의 책이 출간되자 동생이 감옥에서 여동생과 면담하면서 문제의 돈은 살리나스의 돈인데 비겁하게 책임을 미루고 있다고 불평한 녹음테이프가 언론에 공개돼 살리나스는 명예회복은커녕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망국적인 지역주의라는 변수가 있어 그 덕으로 살리나스와는 달리 김 전대통령이 다시 정치적으로 복귀하는 비극적 사태가 발생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서강대 교수·현 미국 UCLA 교환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