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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리뷰]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 "에는 철학이 있다"

입력 | 2000-11-30 16:32:00


시선 1. 김재범 기자가 바라본

"일본 현대사 그늘에 가려진 불행한 사랑의 우화"

각종 국제 영화제에 초청돼 제법 많은 상을 수상하며 호평을 받은 수작이지만, 은 60년대부터 지금까지 우리 관객들이 길들여졌던 일본 애니메이션과는 사뭇 맛이 다르다.

우선, 이 작품에는 현란한 움직임과 관객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지닌 매력적인 영웅이 나오질 않는다. 그렇다고 잔잔하고 온화한 어투로 인생의 중요함과 자연의 소중함을 말하는 흐뭇한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아니메 마니아'라고 자처하는 이들도 당혹할 정도로 무거운 스산한 이야기에 상처 입은 영혼을 지닌 여린 주인공들만 등장한다. 가끔 등장하는 총격전과 같은 액션 장면도 신나고 멋있기보다는 처절하기만 하다.

'애니메이션적' 즐거움이 전혀 없는 것 같은 작품이지만, 은 오히려 전에 느낄 수 없는 재미와 감동, 쌉쌀한 뒷맛이 고루 갖춰진 가작이다.

에서 찾을 수 있는 재미는 우선 독특한 내용에서 찾을 수 있다. 의 줄거리는 시사회 때부터 일부 관객들에게 "너무 복잡한 것 아니야"는 불평을 들을 만큼 다양한 복선을 깔고 있다. 그 내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우선 이 작품의 기획, 원작, 각본을 맡은 오시이 마모루에 대해 조금 알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의 감독으로 유명한 오시이 마모루는 60년대 말 일본을 휩쓸었던 학생운동권 출신이다. 이런 전력 때문인지 그의 작품에는 일본이 자랑하는 고도 물질문명과 대도시의 화려함에 대한 냉소와 관료주의와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이 담겨져 있다. 특히 오시이 마모루는 일본 현대사를 바탕으로 새롭게 재구성한 '또 다른 가상 일본사'를 설정하고, 등 일련의 작품을 제작했다. 역시 그런 오시이의 세계관과 역사관이 투영된 작품이다.

의 시대는 '소화 30년대(55∼65년)'. 전후 고도성장기의 와중에서 일본 내에는 극심한 빈부격차가 발생한다. 많은 실업자들이 도시에 들어와 슬럼가를 형성하고, 이 와중에서 사회에 불만을 가진 '섹트'라는 반정부 세력이 무장투쟁에 나선다.

섹트의 조직원 중에서 특히 '빨간 두건단'이란 도시 게릴라 조직은 목숨을 아끼지 않는 활동으로 진압경찰의 두려운 존재로 부각된다. 시위대를 막는 자치경찰의 능력이 한계에 달했다고 판단한 정부는 강력한 화력과 조직을 갖춘 '수도경'을 창설, 도쿄를 중심으로 한 수도권 안에서의 치안을 맡긴다. 수도경은 일명 '케르베로스(지옥의 파수견)'로 불리는 특수무장기동대(특기대)의 활약을 앞세워 강력한 권력을 차지한다.

하지만 수도경의 급부상은 그동안 도쿄의 치안을 담당해온 '지역 자치경찰'과 자위대 등 기존 권력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킨다. 결국 '수도경' 내외부에서 서로의 이해가 맞은 세력들은 특기대를 해체시켜 자신들의 권력과 지위를 지키기 위해 모종의 음모를 진행하는데….

오시이 마모루와 감독 오키우라 히로유키는 5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까지의 일본의 현대사를 '소화 30년대'라는 시대적 공간에 재편집해서 집어넣었다. 고풍스런 전차와 당시의 시대상을 정밀하게 재현한 풍물들을 통해 과거의 역사임을 보여주면서도, 근미래적인 복장을 한 '특기대'의 모습을 통해 앞으로도 다시 겪을 수 있는 상황임을 암시하고 있다. 한마디로 모호한 시대 설정 속에 일본 현대사의 이면을 담는 실험을 한 것이 이다.

그런데 이러한 극본을 쓴 오시이는 작품의 주제를 결코 거창한 사회적 메시지나 진보적인 구호로 치장하지 않았다. 의 주제는 기본적으로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이다. 이를 위해 오시이는 그림 형제의 을 절묘하게 접목시켰다. 우리에게는 귀여운 소녀 '빨간 두건'과 늑대와의 동화로 알려져 있지만, 의 원본은 잔혹성과 비극적인 결말로 끝나는 성인의 우화이다. 영화 속에서 두 남녀 주인공 후세와 아마미아의 불행한 관계는 우화속 늑대와 빨간 두건과의 만남과 교차되고 있다.

'실사영화' 같은 내용을 가진 을 더욱 영화처럼 느껴지게 하는 것은 감독 오키우라 히로유키가 보여준 독특한 '리얼리즘'이다. 상영시간 내내 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지루하고 답답하다는 인상을 줄 정도로 표정이나 동작에 큰 변화가 없다.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면 으레 등장해야 하는 큰 동선의 움직임이나 극단적인 감정 표현이 없다. 대부분 안으로 감정을 억누른채 조심스레 밖으로 발산하는 그런 모습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나 다카하다 이사오의 이 시각적인 극사실주의 애니메이션의 진수였다면, 은 등장하는 캐릭터의 내면에 사실성을 부여한 '심리적 리얼리즘'을 추구하고 있다.

오키우라 감독은 이런 자신의 의도를 위해 불필요하게 현란한 색을 배제하고 무채색에 가까운 둔중한 색감의 영상을 펼치고 있다. 캐릭터들의 얼굴도 검은 머리에 튀어나온 광대뼈, 가늘고 째진 눈 등 전형적인 몽고리언의 모습을 하고 있다. 대신 극중 배경이 되는 도시의 정경은 사진 못지않게 섬세한 디테일과 사실감을 지니고 있다. 이 감독 데뷔작이라는 오키우라의 연출력은 두 주인공, 후세와 아마미아가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잘 나타난다. 머리를 넘기는 여자의 움직임과,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후세의 눈동자, 무심한 듯 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