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요.’ 한 통신사 광고 카피는 통신이 사람 사이를 좁혀준다는 뜻이겠지만, 반대로 그 거리가 얼마나 아득한 지를 잠깐 생각하게 한다.
과문한 내 경험으론, 사람 사이의 좁혀질 수 없는 거리를 대만 감독 차이밍량의 영화들에 나오는 ‘젖은 방’만큼 섬뜩하게 표현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영화 ‘하류’에서 가족과 의사소통이 단절된 채 물이 새는 방에 살던 아버지는 게이 사우나에서 정체를 알지 못하고 아들과 관계맺는 충격적 결말을 맞는다. 지난달 30일 하이퍼텍 나다에서 개봉된 ‘구멍’에서도 전염병이 번진 대만에서 외롭게 사는 여자의 방은 벽지가 뜯겨질 정도로 심하게 물이 샌다.
젖은 방이, 다가가고 싶은 누군가를 생각할 달콤한 꿈조차 허락하지 않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한 고립을 느끼게 만든다는 것은 겪어본 사람이면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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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리뷰] 희망 없는 세대, 구멍을 통한 구원 찾기
대학시절 잠시 혼자 살던 때, 축축하고 어두운 반지하방을 얻은 적이 있다. 벽에 옷을 걸 수도 없고 이불에 스며든 바닥의 습기가 벌레처럼 온 몸을 휘감는 그 방에 들어서면 우연한 불편이 숙명같은 불행처럼 느껴져 그 무엇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구멍’에서는 여자의 방에 물이 새는 원인을 찾기 위해 위층 남자의 집 거실 바닥에 구멍이 뚫리고, 이 구멍은 외로운 두 남녀의 실낱같은 소통의 통로가 된다. 처음에 구멍에 토악질을 하던 남자는 구멍을 통해 여자를 훔쳐보고, 남자의 시선을 피해 구멍에 살충제를 뿌려대던 여자는 침대까지 젖어버린 방안에서 열병에 걸려 꺽꺽 울며 어두운 곳으로 숨어든다.
대만 여가수 그레이스 창의 노래가 계속 끼어들며 남녀의 마음속 판타지를 표현하지만 소통을 가로막는 현실의 벽이 얼마나 두터운가를 줄곧 비추던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대목은, 여자가 구멍을 통해 내민 남자의 손을 잡고 승천하듯 젖은 방을 벗어나는 마지막 장면. 비록 낭만적 판타지에 불과할 지라도 사람과의 소통에 대한 간절한 염원은, 갈수록 거대해지는 시스템 앞에서 무력하고 소외된 현대인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같은 것은 아닐까. 그것이 덧없는 사랑을 통해서든, 광고 카피처럼 통신을 통해서든 간에.
지금도 까닭모를 고립감을 느낄 때면 10여년 전 잠깐 살았던 젖은 방의 악몽을 꾸는 나는, 방송작가 노희경이 1년전 쯤 쓴 TV드라마 ‘슬픈 유혹’의 잊혀지지 않는 대사 한 마디를 자주 생각한다. “사람이 사람을 위로할 수 없다면 이 힘든 세상 어떻게 살아.”
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