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천년 세계 학계의 가장 큰 관심사는 동양과 서양의 조화로운 공존이다. 신자유주의의 냉혹한 시장논리가 지구촌 곳곳을 몰아치고 있는 현실에서 지식인들은 동양과 서양의 벽을 뛰어넘는 이념적 대안을 모색하려 하고 있다. 마침 유엔은 내년을 ‘문명간 대화의 해’로 정했다. 우리는 외래 문명을 받아들여 ‘사상의 용광로’속에 녹여낸 전통을 갖고 있다. 이런 흐름을 이어받아 동과 서를 넘나들며 새로운 사상을 만들어 가는 학자들을 찾아간다.
지난달 30일 오후 대구 계명대 대학원 4층 대형세미나실, 지정토론자인 계명대 한자경 교수(41)는 발표논문을 밑줄 그으며 열심히 읽고 있었다. 이날 20주년을 맞은 제368회 목요 철학세미나(주최 계명대 철학과)는 특히 한 교수에게 의미 깊은 자리였다. 한 교수의 사유가 바로 이 세미나에서 계속 발표되고 토론되며 닦여졌기 때문이다.
한 교수는 철학박사 학위를 두 개 가지고 있다. 1988년 독일 프라이부르크대에서 칸트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계명대 교수가 됐지만, 바로 다음해에 불교 공부를 위해 동국대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그리고는 지난 여름 ‘성유식론(成唯識論)에서의 식(識)과 경(境)의 관계 연구’로 다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양철학과 서양철학 학위를 함께 갖고 있는 셈이다.
“어차피 제 안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저의 정신은 한국적일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오히려 서양철학은 제게 낯선 것이니까 젊을 때 기회를 놓치면 안 되겠다고 판단해서 서양철학을 먼저 공부하기로 마음먹었지요.”
한 교수는 국사학계에서 큰 발자취를 남긴 고 한우근 선생의 막내딸이다. 학창시절 부친의 ‘한국통사’를 읽으며 한국인으로서 사유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필연성을 알고 있었기에, 철학의 길을 택한 그에게 한국철학은 너무나도 당연한 목적지였다.
“단지 한국의 전통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전통을 사랑하기보다는, 그 전통 속에 살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임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던 어느 날부터인가 한국인의 가장 깊은 사유 속에는 바로 일심(一心)의 사유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됐지요. 일심의 철학 체계가 인도 불교로부터 들어왔든, 일심이라는 개념이 중국 한자로 돼 있든,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간과 출세간을 넘어서는 진리가 내 마음에 있다는 ‘일심’의 문제의식을 통해 서양철학의 ‘자아’ 문제에 다가갔다. 독일에서 칸트의 ‘초월적 자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데카르트부터 푸코와 라캉에 이르는 서양철학자들의 자아 문제를 정리했고, 그 성과는 1997년 ‘자아의 연구’란 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한편 불교의 연기론적 사유와 서양철학의 실천론적 사유를 비교하며 ‘자아의 탐색’(1997)을 저술했고, 불교 유식학(唯識學)의 인식론을 통해 자아와 존재의 문제를 고민하며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서양인이 천성적으로 무대 위로 뛰어올라와 극 중에서 자신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멕베드적 현실주의자라면, 동양인은 천성적으로 무대 너머 자유를 추구하며 해탈의 꿈에 젖기를 좋아하는 관념론자인 것 같습니다.”
1997년 ‘자아의 연구’와 ‘자아의 탐색’이란 두 권의 책을 내면서 후기에서 그는 “자아라는 나의 유령을 벗어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아’를 찾는 그의 여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앞으로 무아론(無我論)을 중심으로 불교에서 자아의 문제가 어떻게 전개돼 왔는가를 연구할 계획이다. 그러다 보면 심성론(心性論)과 같은 유가의 자아론도 함께 연구하게 될 것이고, 거기서 자연히 동서양의 철학이 어우러지는 한국철학의 ‘자아’에 이를 것이다.
▼한자경 교수 약력▼
△이화여대 철학과 졸업(1981년)
△이화여대 석사, ‘후설 현상학에 있어서 보편 의미와 개별 대사의 관계’(1983년)
△독일 프라이부르크대 박사, ‘존재론으로서의 초월철학’(1988년)
△동국대 불교학과 석사, ‘유식에서 인식과 존재’(1991년)
△동국대 불교학과 박사, ‘성유식론(成唯識論)에서의 식(識)과 경(境)의 관계 연구’(2000년)
△계명대 철학과 교수(현재)
△저서로 ‘칸트의 초월철학’ ‘자아의 연구’ ‘자아의 탐구’(서광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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