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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누가 날보고 한물 갔다 했나"

입력 | 2000-12-03 19:04:00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막판 무서운 뒷심을 발휘하며 결승선을 통과한 ‘봉달이’ 이봉주(30·삼성전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지친 표정이었지만 ‘해냈다’는 승리감에 취해있었다.

비록 우승은 못했지만 2시간9분4초로 당당히 2위. 시드니올림픽 후 두달 만에 또다시 풀코스에 출전한 ‘무리한 도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보아란듯이 해냈다. 건재를 과시한 기록이었고 자존심을 지킨 준우승으로 그가 아니고는 감히 이뤄낼 수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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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일본 후쿠오카에서 열린 2000후쿠오카국제마라톤. 이봉주는 레이스를 끝낸 뒤 시드니올림픽 이후 그를 괴롭혀온 ‘치욕의 멍에’를 벗었다는 성취감에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이봉주의 이날 레이스에는 ‘한’이 담겨 있었다.

헤이와다이스타디움을 3바퀴 돌고 거리로 나선 이봉주는 페이스메이커 프레드 키프로프(케냐), 지난해 도쿄마라톤 우승자인 거트 타이스(남아공) 등과 선두권을 형성해 순조롭게 질주했다. 고비는 28.7㎞지점. 페이스메이커가 초반 5㎞를 14분54초에 주파하는 등 다소 빠른 페이스로 선두권을 끈 관계로 체력이 달리면서 처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이봉주는 31.5㎞지점 반환점에서 선두권에 150m처지며 주춤했으나 페이스를 잃지 않는 끈질긴 레이스를 펼쳐 41㎞지점에서 시드니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게자헹 아베라(5위·2시간9분45초·에티오피아)를, 42㎞지점에서 압델라 베하르(3위· 2시간9분9초·프랑스)를 따돌리는 투혼을 발휘하며 2위로 결승선으로 날아들었다.

이봉주는 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조시아 투과니(남아공)에 아깝게 금메달을 내준 뒤 이곳 후쿠오카에서 보기 좋게 복수하며 우승했고 이번에 다시 후쿠오카에서 올림픽 불운을 씻어내 대회 출전의 의미를 더했다.

시드니올림픽 레이스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24위라는 수모를 당한 이봉주는 이번 대회가 열리기 전까지 ‘마음고생’이 심했다.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것을 뒤로하더라도 ‘한물 같다’ ‘넘어지지 않았는데 변명하는 것 아니냐’ 등 주위에서 숱한 비난이 쏟아져 죽고싶은 심정이었다.

‘후쿠오카 승부수’는 바로 이 때문에 나오게 됐다. 이대로 있다간 영원히 ‘잊혀진 마라토너’가 될 수 있었기에 자신의 건재함를 분명히 보여주고 싶었던 것.

그래서 올림픽 이후 단 2개월만에 후쿠오카마라톤 출전을 감행한 것이다. 2월 도쿄마라톤, 10월 올림픽, 그리고 이번 후쿠오카 레이스. 선수생명이 짧아진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지만 이봉주는 혼자 판단으로 레이스에 참가했고 결국 ‘명예회복’이라는 귀중한 수확을 거뒀다.

한편 ‘일본 마라톤의 샛별’ 후지타 아쓰시(24·후지쓰)는 이날 2시간6분51초로 종전 아시아기록(2시간6분57초·이노부시 다카유키)를 6초 앞당기는 아시아최고기록으로 우승, 일본열도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yjong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