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 첫 사랑의 고백 같은 영화다. 완결된 사랑은 쉽게 무감각해지지만 첫 사랑의 고백이 이뤄지기 전까지의 사랑은 신열처럼 짜릿한 아픔을 준다.
는 막 사랑이 완성되는 그 순간에 밤새 보낼까 말까 망설였던 연서를 밀봉하듯 서둘러 이야기를 끝내버린다. 저물녘 황토 빛 먼 산을 바라보며 서 있는 두 연인의 실루엣 사이로 엔딩 내레이션이 흐른다. "우리의 이야기는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의 엔딩은 두 연인의 사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지점'인 셈이다. 거꾸로 말하면 영화가 끝나도 이들의 사랑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들키지 않은 사랑, 그 풋풋한 엔딩 장면을 리와인드시키면 중간중간 문득 '우연'이 끼여든다. 한국에 사는 남자와 일본에 사는 여자. 더 자세히 말해 서울 동사무소에서 일하는 남자 우인(이정재)과 동경 재수학원에 다시는 20세 풋내기 소녀 아야(다치바나 미사토)가 교감을 나누기 위해선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 번째 조건은 '우연'이다. 우연이 아니라면, 아무리 같은 위도 상에 존재하는 나라라 해도 일본인과 한국인이 사랑에 빠질 확률은 거의 없다. 한국인이 일본으로 놀러가거나, 일본인이 한국으로 놀러가지 않는 한 말이다.
'우연은 언제가 운명이 된다'는 카피문구처럼 는 끊임없이 우연의 모티프를 들이민다. 동사무소에 근무하는 우인이 일본 여학생 아야와 어떻게 첫 만남을 가졌는지, 두 사람이 어떻게 두 번째로 만나고, 다시 세 번째 만남을 갖게 되는지. 기적처럼 이어지는 두 사람의 우연은 낯선 도시의 사랑을 가능태로 바꿔놓는다.
두 번째 조건은 '편지'라는 전지구적 매체를 활용하는 것이다. 엔 온갖 종류의 우편물이 등장한다. 동사무소 직원 우인이 돌리는 고지서들, 군사우편, 짧은 메모에 이르기까지. 여기에 덧붙여지는 가장 세련된 편지는 바로 '인터넷 편지'다. 21세기 영화답게 는 두 연인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소통의 통로를 인터넷에서 찾는다. 화상 인터넷 채팅은 동시성이 있고, 편지처럼 얼굴 몰라 애태우는 답답함도 없으니, 두 도시의 사랑을 이어주는 통로로선 금상첨화인 셈이다.
우인과 아야는 타인과의 접촉을 지극히 자제하는 이 시대의 자폐아들이고, 꿈을 잃어버렸다는 점에서 닮았다.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처럼 두 사람은 사는 데 무심하다.
우인은 풍족한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학교를 졸업하고 안정적인 공무원으로 사회 첫발을 내디뎠으나, 삶의 낭떠러지에 서있는 것처럼 위태롭다. 사랑은 잘 안되고, 회사에선 매일 머저리 취급받는다. 그는 직장 상사의 지적처럼 "정신 나간" 사회 초년병이다.
재수학원에 다니는 아야는 죽음을 꿈꾸는 소녀다. 좋은 집안에서 부족한 것 없이 자랐지만, 삶이 거기서 끝난다 해도 별로 아쉬울 게 없다고 생각한다. 소녀적 감수성에 푹 빠져있는 그녀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일이 너무 멋지지 않냐"고 말한다.
영화의 오프닝 멘트는 아야의 '감미로운' 유서다.
"한 달 후면 나는 죽는다. 어제도 오늘도 아닌 그곳에서. 숨을 길게 참고 죽음에 이르는 거다."
죽음을 꿈꾸던 소녀는 한 달 후 자신의 생일에 맞춰 죽고싶다는 바람을 이루지 못한다. 그때 그녀에겐 새로운 가능성이 생긴다. "어제와 오늘의 경계선을 넘으면, 어제가 오늘이 되는 그곳에서 죽을 수 있겠구나". 어제가 오늘이 되는 그곳은 날짜변경선. 그녀는 날짜 변경선을 지나가는 알래스카 행 비행기표를 사기 위해 돈을 모으고, 급기야 인터넷 에로 사이트의 여주인공이 된다.
그녀의 가명은 일명 '구두 신은 아사코'. 사는 게 무료한 20대 청년 우인은 자신의 방에서 '구두 신은 아사코'를 보고, 만지고, 느낀다.
에서 구질구질한 생활의 냄새를 모두 탈색시켰던 이재용 감독은 이 영화에서도 여전히 인공적인 아름다움에 몰두한다. 창밖엔 여전히 에서 보았던 애처로운 그 비가 내리고, 지하철에서 흘러나오는 바람이 여주인공의 머리카락을 살짝 나부끼게 한다. 오래된 가요가 흘러도 촌스럽지 않고, 구질구질한 삶의 징표(먹고, 자고, 싸는 일상)를 카메라에 담아도 남루하게 보이지 않는다.
에로티시즘에 함몰될 뻔한 아야의 인터넷 생방송 장면에는 '뮤직박스'의 배경음악을 깔아 순수한 느낌을 배가시켰으며, 가끔 스냅 사진처럼 영상을 정지시켜 긴 여운을 만들어냈다. 최소한 이재용 감독은 에서 초심을 잃지 않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고히 지킨 셈이다.
가끔씩 끼여드는 코믹한 대사들도 고급스런 영상을 다치게 하지 않을 만큼 적당하며, 이야기의 이음새도 탄탄하다. 게다가 우인 역을 맡은 이정재의 연기엔 기름기가 없고, 일본 신세대 여배우 다치바나 미사토의 연기엔 신인 답지 않은 안정감이 흐른다.
의 홍경표 촬영감독이 주물럭거린 의 영상도 고급스런 포장지에 쌓인 일본 신세대 소설처럼 달콤하다. 는 순진한 소녀의 감수성을 살짝 건드려주기에 좋은, 21세기 타입의 세련된 연애편지로서 손색이 없다. 12월9일 개봉.
황희연 benotb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