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거래법 제188조의 5 제1항은 시세조종(주가조작)의 배상책임을 명문(明文)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조항이 적용돼 주가조작 피해에 대한 배상책임이 내려진 적은 한번도 없었다.
주된 이유는 두 가지. 주가조작과 피해발생(투자손실) 사이의 인과(因果)관계 입증이 쉽지 않은 데다 손해액을 산정하는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다.
5일 내려진 서울고법의 대한방직 주가조작 손해배상 판결은 주가조작과 피해발생의 인과관계를 인정하고 손해배상액의 기준을 처음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일반 투자자들이 주가조작으로 입은 손해를 배상 받을 수 있는 길을 연 것이다.
가장 예민한 쟁점인 손해액 산정에서 재판부는 ‘정상가격’의 논리를 적용했다. 주가조작이 없었더라면 주식을 보다 싼 가격(정상가격)에 살 수 있었을 텐데 주가조작으로 ‘뻥튀기’된 주식을 비싸게 사서 손해를 본 만큼 정상가격과 매입가격의 차이를 손해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 사건에서 원고 유씨 등은 97년 11월5∼25일 사이에 대한방직 주식을 집중 매수했다. 그런데 LG화재 직원 등 작전세력들은 97년 1월7일부터 작전을 개시, 그 해 11월7일 14만2000원으로 주가를 끌어올렸다. 따라서 유씨 등은 주가조작으로 비싸게 주식을 샀다는 것.재판부는 작전개시 전 3년간 대한방직의 주가는 최고 10만2000원이었으므로 작전이 없었다면 유씨 등은 아무리 비싸게 사도 이 가격(정상가격)보다 비싸게 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논리를 택했다. 따라서 이들이 10만2000원보다 비싸게 산 주식대금 만큼을 손해로 인정한 것이다.
이에 대해 강용석(康容碩)변호사는 “법원의 고민은 이해할 수 있지만 최고가를 정상가로 보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며 “실제로는 이보다 더 싸게 샀을 가능성이 많으므로 감정을 통해 정상가를 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증권업계는 이번 판결을 크게 환영하는 분위기다. 주가조작 등 이른바 ‘작전’을 통해 이익을 보려는 ‘세력’들에게 경종을 울려 주식시장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다.
또 금융감독원이 내년 4월부터 ‘작전’을 하다 적발되면 주식투자를 할 수 없도록 할 방침이어서 주가조작 등 작전은 크게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주가조작에 대한 수사와 처벌 및 손해배상이 너무 늦게 이뤄지고 있는 점은 앞으로도 개선돼야 할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굿모닝증권 강창희(姜敞熙)상임고문은 “월가 등 선진국 주식시장은 불공정거래에 대해 철저하게 응징하기 때문에 건전한 발전이 이뤄지고 있다”며 “주식투자 문화를 바로 세우기 위해선 가혹할 정도로 처벌과 손해배상 등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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