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괴물 그린치가 2천만 달러 짜리 배우 짐 캐리를 훔쳤다! 후빌 마을의 전설적인 악동 그린치는 쓰레기 뒤지기, 우편물 바꿔치기, 아이 울리기의 선수. 산꼭대기 동굴에서 외롭게 살다 심통만 늘어난 그는 급기야 후빌 마을의 크리스마스까지 훔쳐낸다. 루돌프 사슴 대신 강아지 맥스를 타고 거대한 진공 흡착기를 손에 쥔 그가 벌이는 짓은 심술궂기 그지없다. 크리스마스 이브, 남의 집 굴뚝에 침범해 선물과 트리를 모두 긁어모으고 집집마다 걸려있는 오색 전등을 모조리 박살낸다. 그리곤 툭 내뱉는 말이 "난 크리스마스를 증오해!"
◇짐 캐리를 훔쳐간 그린치◇
가당치도 않은 이 '크리스마스 훔치기' 대 작전에 투입된 그린치를 보며 짐 캐리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짐 캐리는 도대체 어디 숨어 있는 거야? 언뜻언뜻 보이는 짐 캐리 식 표정연기가 아니라면 도저히 믿지 못할 털 복숭이 괴물. 짐 캐리는 바로 이 괴물의 몸 속에 살짝 숨어 있었다.
온몸에 녹색 라텍스를 붙이고 그 위에 녹색 야크 털을 한 올 한 올 꿰맨 그린치 의상. 제작하는 데 무려 4개월이 걸린 이 무지막지한 '갑옷'은 짐 캐리를 초록 악동으로 쉽게 바꿔놓았다. 하지만 그 정도 분장으론 어림도 없었다. 혈기 오른 노란 색 콘택트 렌즈로 눈을 가리고 삐뚤삐뚤 난 누런 틀니로 이빨을 가렸다. 분장을 끝낸 짐 캐리는 이제 더 이상 짐 캐리가 아니었다. 그는 영락없이 40여 년 전 수스 박사의 머릿속에서 뛰쳐나온 상상의 괴물 그린치로 변해있었다.
"원작에 묘사된 그린치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리고 싶었다. 난 정말 '진짜'처럼 보이고 싶었다."
짐 캐리는 자기를 억지로 드러낼 마음이 없었다. 그린치 뒤에 적당히 숨어 상상 속 존재를 진짜처럼 보이게 한다면 그걸로 족했다. 에서 짐 캐리와 함께 일했던 패럴리 감독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짐은 아주 상업적인 형태의 정신병을 앓고 있다. 그는 매우 근사한 사람이다. 아량도 넓고 마음도 따뜻하다. 하지만 그는 상처 입은 동물이다. 짐을 은유법으로 표현하자면, 주인에게 주기적으로 물리는 개라고 할 수 있다. 주인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모든 짓을 다하는 그런 개. 그는 자기 스스로 뒷다리를 걸고, 굴러도 본다."
그는 항상 이런 식이다. '덤 앤 더머(dumb and dumber)'가 되더라고 웃겨야 직성이 풀린다. 사람들은 이런 짐 캐리에 대해 쉽게 "몸을 팔아서 성장한 배우"라고 말한다.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몸을 비트는 스탠딩 개그맨에게 사람들은 웃음을 주는 만큼 비아냥거림도 주었다. "그런 것쯤 상관없어"라고 말하는 그도 사회 초년병 시절 가슴에 응어리 한 줌을 키웠을 것이 분명하다. 배고팠던 시절, 그는 2천만 달러 짜리 배우가 아니라 단 돈 몇 달러에 웃음을 파는 피에로나 다름없었다.
◇웃음을 잃지 않은 어린 시절◇
1962년 1월17일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태어난 짐 캐리의 어린 시절은 불운한 기억으로 가득했다. 재즈 색소폰 연주자를 꿈꿨으나 회사 경리로 만족해야 했던 아버지 피시 캐리는 짐의 나이 14살 때 직장에서 쫓겨났다. 10세 때 TV 토크쇼 에 이력서를 보낼 만큼 당돌한 아이였던 짐 캐리는 그때부터 이미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전 가족이 타이탄 흰스 공장 빌딩 관리인으로 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짐 캐리는 아침부터 오후까지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수업이 끝나면 곧 바로 공장에서 8시간의 교대 근무를 섰다. 성적이 바닥으로 고꾸라진 건 당연지사. 학업을 지속하기엔 몸도 마음도 모두 지쳐있었다. 비좁은 캠핑 카에서 할아버지, 엄마, 아빠, 세 명의 형제와 함께 생활해야 했던 시절, 짐 캐리는 일찍 자신의 갈 길을 정했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 그는 학교 성탄절 연극에서 산타클로스를 연기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아이들은 물론 선생님들까지 짐의 연기를 보며 자지러지게 웃어주었다. 남들이 웃을 때 그는 자신이 더없이 행복해질 수 있음을 알았다. 갈 곳 없는 그가 향했던 곳은 남을 웃길 수 있는 코미디 클럽이었다.
성대묘사에 능했던 그는 제임스 스튜어트, 마이클 랜든, 간디 등의 유명인사와 알코올 중독자였던 할아버지를 흉내냈고, 데이비드 레터맨의 호평에 힘입어 NBC 시리즈 드라마 'The Duck Factory'의 주연으로 발탁됐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짐에게 생각만큼 큰 성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의기소침해 하고 있을 무렵, 드디어 그에게 영화 출연 제의가 들어왔다. 리처드 레스터 감독의 'Finder Keepers'.
이후 'Earth Girls are Easy' 에 조연으로 출연했던 그는, 94년 자신의 끼를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영화 와 만나 드디어 스타덤에 오른다. 이 영화에서 마이애미 싸구려 탐정을 연기했던 그는 코미디 클럽에서 익힌 '온몸 개그'로 사람들을 웃겼다. 는 미국 내에서만 약 7천2백 만 달러의 수익을 거뒀고, 짐 캐리는 찰리 채플린, 버스터 키튼, 로빈 윌리엄스의 뒤를 잇는 할리우드 스탠딩 개그의 일인자로 떠올랐다.
◇개그맨에서 진짜 연기자로◇
로 연타석 홈런을 날린 그는 이제 더 이상 올라설 곳이 없을 만큼 성장했다. 2천만 달러 클럽에 제일 먼저 이름을 올렸고, 그의 스케줄이 비기만 기다리는 영화가 줄을 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출연한 는 짐 캐리에게 뼈아픈 각성을 안겨주었다. 그는 스타에 대한 팬들의 애정이 쉽게 변할 수 있는 것임을 알았다. 쉽게 질리고, 아무 미련 없이 새로운 스타에게 또 다른 애정을 쏟아 붓는 사람들.
그들은 똑같은 표정으로 남을 웃기는 짐 캐리에 대해 더 깊은 애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는 흥행 및 비평 면에서 모두 철저히 깨진 짐 캐리 최대의 실패작이다.
사람들이 짐에게 코미디가 아닌 진짜 연기를 보고 싶어했을 때 그는 적절한 변신을 감행했다. 는 그 전초전 격인 영화였고, 본격적인 변신은 에서 이루어졌다.
침대 위에서의 '그 짓'만 빼고 1년 365일 TV 카메라에 자신의 삶이 생방송되는 줄도 모른 채 살았던 남자 트루먼 버뱅크. 쌩긋 웃는 표정 안에 담긴 트루먼의 절망적인 몸부림은, 짐 캐리가 드디어 연기파 배우로 거듭났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짐의 매니저는 그때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짐이 중후한 전쟁영화나 범죄영화에 뛰어드는 건 한마디로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다. 처럼 코미디와 판타지가 드라마틱하게 어우러지는 작품이라야 했다. 는 우리의 생각에 딱 맞아떨어지는 대본이었다."
그 후 짐 캐리에겐 새로운 도전이 이어졌다. 어린 시절부터 선망의 대상이었던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코미디언 앤디 카우프만. 그의 일대기를 다룬 전기영화 에서 짐은 앤디 카우프만 역을 맡았고, 패럴리 형제의 코미디 영화 에선 행크와 찰리 1인2역을 맡아 화합할 수 없는 정신분열증자의 내면을 멋지게 연기해냈다. 은 결국 실패작으로 기록되고 말았지만, 그는 앤디 카우프만처럼 외모를 꾸미고, 앤디 카우프만처럼 울고 웃는 그 역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은 사랑스러운 연인을 만난 영화라는 점에서 잊을 수 없는 작품이다. 짐은 이 영화에서 공연한 르네 젤위거에게 한 눈에 반했고, 촬영이 끝난 후 본격적인 구애작전을 펼쳤다. 현재 두 사람은 공식석상에 함께 등장하는 공공연한 연인 사이다.
◇온 몸을 던져 일하는 배우◇
스타가 된 후에도 거만 떨지 않고 온 몸을 던져 일하는 배우는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짐 캐리는 할리우드 감독들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배우다. 조엘 슈마허 감독은 그에 대해 "스타가 된 후에도 변함없이 단 한 장면을 연기하기 위해 며칠을 투자하는 노력파"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그린치'로 변신하기 위해 매 촬영 때마다 3시간이 넘는 긴 분장을 참아냈고, 자기 팔로 자신의 빰을 때리는 무모한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오래 전 엄마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난 어린 시절 침실 말고는 세상 어느 곳에도 관심이 없었다. 하루종일 침실에만 쳐 박혀 지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내가 쓰레기를 밖에 내놓는 것 같은, 뭔가 정상적인 일을 했으면 하셨다."
영화 속에서 그는 엄마의 바람과 달리 '정상적인 일'을 잘 하지 못하지만, 영화 밖에서 그는 엄연히 정상적인, 남들이 우러러보는 스타다.
하지만 그는 먼 미래에 자신이 스타로 남아있지 않을 수도 있음을 잘 알고 있다.
"45세쯤 되었을 때 내가 대단한 스타라고 말해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난 지금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진짜 고요한 삶을-."
짐 캐리는 스타로 남고 싶은 욕심보단 정상적이길 바랬던 엄마의 바람처럼 '정상적인 삶'을 살고 싶어할 따름이다. 그를 스타의 자리에 오래 잡아놓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를 사랑하는 관객밖에 없다.
황희연 benotb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