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유하(37)가 최근 여섯번째 시집 ‘천일馬화’(문학과 지성사)를 펴냈다. 1991년 시집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에서 소비과 물신주의의 공간인 압구정동을 무대로 시대의 욕망을 야유했던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는 투기와 질주의 공간인 경마장을 해부했다. 시인 유하와 문학평론가 이광호(서울예대 교수)가 ‘천일馬화’에 나타난 시적 공간과 풍자, 세태비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광호〓‘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 이후 1년만의 새 시집이군요.
유하〓사실 그 전부터 준비해왔습니다. 1995년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이후 이번 시집을 준비해왔고, ‘나의 사랑…’은 중간 과정의 산물입니다.
이〓‘천일마화’ 연작이 시집의 중심을 이룹니다만, 우리 시대와 사회에 대한 풍자의 코드로 ‘경마장’이 사용되고 있어요. 어떤 이유 때문입니까?
유〓1차적으로는 욕망의 문제를 다뤘습니다. 경마장에서 돈을 거의 다 잃은 사람들이 악다구니를 하며 창구에 몰려드는 모습을 보았어요. ‘서두르세요, 닫을 시간입니다/박 터진 당신, 의치 값은 만들어야잖아요. 왜 이리 밀어’(천일마화―The Waste Land). 그 군상들을 보며 저것이 내 내면풍경이고, 우리 세대의 모습이라고 생각한 것이죠. 그 모습에서 가장 큰 시적 에너지를 얻었습니다.
이〓시집의 화자는 경마장에서 욕망의 충만한 에너지에 매혹을 느끼며 동시에 반성적 비판을 행합니다. 이런 모습은 ‘세운상가…’ ‘압구정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군요. 경마장은 도박장인 만큼 인생의 배팅에 대한 욕망과 좌절에 대한 실존적 풍자가 더욱 가슴에 와 닿습니다. 말이 갖고 있는 에너지와 성적인 은유도 실감나구요.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은 말(言)과 말(馬)의 동음이의를 통한 말놀이입니다. 시집 제목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천일‘야’화)에 ‘말 이야기’ 가 겹쳐집니다.
유〓경마장을 소재로 택하게 된 데는 그 이면에 대중문화의 불온성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도 큰 이유가 됐어요. 내가 지금까지 채용했던 소재는 압구정동 세운상가 등 하위문화의 코드들입니다. 그런데 그 코드들이 이제는 주류문화로 편입된 상태가 됐어요. 그래서 경마장이란 공간을 새로이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천일마화’ 시편들 외에 여행시편과 자전거 시편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어요. 속도의 측면에서 ‘천일마화’ 시들이 질주의 공간을 보여주는 반면 이 시들은 이에 반하는 소요(逍遙)의 시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이제는 ‘느림’이라는 말이 상투화되어 있지만, 지난해 유럽여행을 하면서 ‘21세기란 자전거의 시대가 아닌가’라고 느꼈어요. 인간의 몸이 엔진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속도의 자본주의 문명에 대항하는 사회적 대안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이〓‘몸이 엔진이 된다’는 말은 자본주의적 몸문화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매력적인 표현이군요. 이런 시들이 포함된 결과 이번 시집에서는 ‘압구정동’이 가지는 파괴력과 ‘세상의 모든 저녁’이 지니는 깊은 서정성을 동시에 발견하게 됩니다.
유〓‘압구정동’이나 ‘천일마화’는 나만이 쓸 수 있는 시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 시들의 세계는 ‘욕망의 네버 엔딩 스토리’를 보여주고 있지요. 앞으로도 나의 시 세계는 주로 이 같은 방식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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