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애보(純愛譜)’는 제목부터 멜로드라마의 외피(外皮)를 쓰고 있지만, 정작 멜로가 시작되려는 무렵에 영화가 끝나 버리는 기묘한 구조를 지녔다. ‘사랑, 그 이전의 이야기’쯤이 될 이 영화는 사랑 자체보다 서울과 도쿄에 사는 두 남녀의 소소한 일상, 잦은 우연 속에 어떻게 운명같은 인연이 스며드는지를 꼼꼼히 스케치하는 데에 무게를 실었다.
서울의 한 동사무소 직원 우인(이정재)은 무능하기 짝이 없는 남자다. 그는 미아(김민희)를 좋아하지만, 냉대만 당하자 인터넷 포르노 사이트에서 미아와 닮은 아사코에게 빠져든다. 도쿄의 재수생 아야(다치바나 미사토)는 파탄 직전에 이른 가족 때문에 숨막혀 하고, 날짜변경선 위에서 숨을 참아 자살하기를 원한다. 죽으러 갈 돈을 모으려고 그는 인터넷 포르노 사이트에서 아사코라는 이름의 모델이 된다.
이 영화는 특별히 불행한 것도 아니면서 삶의 출구를 찾지 못해 우울해 하는 우인과 아야의 일상, 이들이 사는 동네의 표정과 주변 인물들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극적인 치장을 벗은 현실적 캐릭터와 풍성한 디테일이 이 영화의 장점. 하지만 드라마틱한 굴곡을 기대한 관객이라면 다소 무료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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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 서울과 도쿄에서 비슷한 자리를 맴돌던 우인과 아야가 만나는 시점은 이들이 일종의 성장을 경험하는 때이기도 하다. 우인이 떠날 결심을 할 무렵, 다쳐도 통증을 못느끼던 새끼 손가락의 감각이 회복된다.
아야는 비행기 안에서의 자살에 실패한 뒤 울음을 터뜨리지만, 곧 살아서 다행이라는 듯 미소 짓는다. 일상에서의 탈출을 통해 얻어진 우인과 아야의 ‘성숙’에 비한다면, 잦은 우연 끝에 드디어 알래스카에서 만난 이들의 멜로는 오히려 사소해 보인다.
이정재는 기존의 도회적 이미지를 버리고 촌스러운 차림에 위축된 듯한 우인의 역을 실감나게 연기했다. 톡 쏘는 맛의 김민희와 귀여운 이미지의 일본 여배우 다치바나 미사토의 연기도 좋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등의 영화들을 시치미 뚝 떼고 인용하거나 아야의 이름을 활용하는 방식 등 곳곳에 숨겨진 유머를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한국 시네마서비스, 쿠앤필름과 일본 쇼지쿠 영화사가 함께 제작비를 댄 한일 합작영화. 9일 개봉. 15세이상.
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