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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이규민]이 글도 유언비어?

입력 | 2000-12-08 18:31:00


적어도 이 정권 아래서는 유언비어 단속이라는 말이 안 나올 줄 알았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 유언비어를 빙자한 독재정부의 탄압에 가장 큰 피해자가 바로 지금의 집권 여당이기 때문이다.

국회기록을 보면 그 때 야당은 정부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어느 것이 유언비어이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를 판단할 양심적 눈이 당신들에게 있는가. 유언비어는 정치가 실패해 세상이 어수선할 때 자연발생적으로 나오는 것으로 정부가 단속의 칼날을 세울수록 더욱 기승을 떨게 마련이다.”

‘흉보면서 닮는다’는 속담대로 지난주 ‘국민의 정부’가 놀랍게도 군사정권이 했던 유언비어 단속을 선언했다. ‘정부가 대북문제에 매달리다 경제가 어려워졌다’는 내용의 유인물이 서울에 뿌려졌고 ‘모 재벌그룹이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다’는 소문이 증권시장에 나돌던 때였다.

정책 비난까지 단속의 대상이라는 해괴한 내용 때문에 항간에는 정부요인에 대한 비방이 주단속 대상일 것이라는 말이 유언비어처럼 나돌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예언은 빗나가지 않았다. 경찰이 사흘전, 단속의 첫 번째 ‘소득’으로 내세운 사안은 김대중대통령에 대한 비방 케이스였다. 조사대상이 됐던 부산의 30대 남자가 신문사 홈페이지에 올린 글은 사실 그 내용이 너무나 치졸해서 두둔은커녕 입에 올리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조악했다.

문제는 이보다 훨씬 추하고 메스껍고 잔인한 글들이 하루에도 수없이 컴퓨터 화면을 장식하는 것이 현실인데 왜 새삼 대통령을 비방한 글을 유언비어로 문제삼았느냐 하는 점이다. 온라인상에서 빚어지는 언어폭력이 심각한 사회문제이긴 하지만 경찰이 좀 더 현명했더라면 또다른 유언비어의 출몰을 막기 위해서라도 대통령을 언급한 이번 사건만큼은 모른 척 넘어가는 것이 더 나을 뻔했다.

증시 루머만 해도 그렇다. 기업을 음해하는 헛소문은 용서할 수 없지만 ‘루머에 사서 발표에 팔라’고 할 정도로 증시에서는 루머도 중요한 정보의 하나로 여겨진다. 문제는 신빙성인데 그런 루머에 현혹되고 안되고는 전적으로 투자가의 판단에 속한다. 특정기업에 대한 악성 루머는 해당 기업이 법률적으로 대응하면 되는 사안 아닐까.

96년에도 안기부까지 나서서 이번과 똑같이 이른바 사설 정보유통에 대해 칼날을 세웠지만 수사 소문이 나면서 오히려 주가가 폭락해 정부를 난처하게 했고 단속의 대상이 됐던 사설 정보공급업은 근절되기는커녕 오늘날 더욱 번창하고 있다. 어차피 정보유통이라는 것이 수요와 공급이라는 시장원리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원하는 쪽이 있는 한 계속 생겨나게 되어 있다. 단속이 얼마나 실속을 차릴 수 있을지 궁금하다.

권위주의가 팽배해서 상대적 열세의 사회구성원들이 마음을 열 수 없을 때 루머는 세균처럼 번식한다. 병든 사회일수록 소문이 기승을 부린다는 것은 우리의 역사에서 ‘유비통신’과 ‘카더라방송’이 어느 시절에 나왔는지를 돌이켜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정권의 정통성이나 국민의 의식수준이 그 때와 천양지판으로 다른데 왜 또다시 수사기관이 단속에 나서야할 정도로 루머가 기승을 부리는지는 당사자인 정부가 더 잘 알 것이다.

여권실세를 둘러싼 끝없는 잡음, 공공기관의 낙하산인사와 국세청 경찰청 인사에서 나타난 특정지역주의, 국민의 눈에 하나부터 열까지 끌려다니는 것으로만 비쳐진 남북관계, 노조와 뒷거래하면서 겉으로 시늉만 내는 공기업개혁, 맥잃은 구조조정과 위기상황의 경제 등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이 정권이 자초한 여론상의 악재들은 모두 유언비어를 숙성시키는 거름들이다. 이런 판에서는 아무리 강력하게 단속을 해도 여론은 계속 유언비어를 만들어 나갈 뿐이다.

해결방법? 그건 지극히 간단하다. 정부가 반성하고 유언비어의 원천이 되는 그런 일들을 하지 않으면 된다. 불행하게도 그럴 의지나 용기가 없다면 차선책이 하나 있다. 누가 뭐라든 욕지거리에도 대범하고 악성루머에도 자신만만한 정부가 되면 된다. 비판에도 당당하고 반대논리에도 너그러울 수 있는 정부가 병의 원인인 실정(失政)은 놓아두고 증세인 유언비어만 제거하려는 정부보다는 훨씬 낫지 않을까.

kyum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