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데뷔작은 85년 12월 KBS 일요아침드라마 ‘해돋는 언덕’이었다. 당시 중앙대 연극영화과 3학년 재학 중이던 나는 그해 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동문의 밤’ 행사에서 19년위 선배였던 KBS 최상식 PD를 만났다가 탤런트로 출연해보지 않겠느냐는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그때까지 탤런트를 할만큼 자신이 이쁘다는 생각은 한번도 못해봤기 때문에 연극배우가 유일한 꿈이었다. 83학번 과동기 중에 이재룡과 김일우 정호근 등은 이미 탤런트 시험에 합격한 상태였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얘기였다.
하지만 매학기 한편이상씩 워크샵 연극에 참여하면서 내 연기력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던 차라 다른 분야에 도전해보고 싶어 덜컥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주연을 맡은 정한용선배의 여동생역이었다. 그러나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이라고 안 샐 리 없었다. 대사처리도 어눌하고 연기도 비참했지만 목소리에 대한 콤플렉스도 상당히 컸다.
당시 여자탤런트를 하려면 편안하고 부드러운 미성이어야했다. 비음이 섞인 나는 ‘그런 목소리로 어떻게 배우할 생각을 했느냐’는 핀잔까지 들어야했다. 후회막심이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대하극 ‘노다지’(86년)에 주연급으로 캐스팅됐고 ‘젊음의 행진’ MC와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던 ‘가위 바위 보’의 DJ까지 맡으며 일은 잘 풀렸다.
스스로 들들볶는 스타일의 나로서는 고통스런 순간이기도 했지만 돌이켜보면 행복한 시기이기도 했다. 후배를 끼고 앉아 혹독하게 가르치던 선배들 덕분에 연기에 눈뜰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니저 코디네이터 분장사를 줄줄이 끌고다니느라 선배와 개인적인 대화조차 나누지 못하는 요즘 후배들을 보면 더욱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