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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시대]정치명가 반항아가 세계 리더로

입력 | 2000-12-13 18:53:00


35일간의 우여곡절 끝에 사실상 대통령 당선자로 확정된 조지 W 부시 후보는 참모들에게 비중을 두고 국정을 운영하되 최종 결단은 스스로 내리는 ‘보스형 지도자’라는 평을 받고 있다. 텍사스주지사로 일할 때도 참모들을 신임하면서 그에 합당한 권한을 부여하고 결정을 내려야 할 사안에 대해서는 권고안을 제출토록 해 최종 판단을 내리는 방식으로 주를 이끌어왔다.

▼참모중시 보스형 지도자▼

그의 이러한 통치 스타일은 전대미문의 플로리다주 재검표 소동 와중에서도 나타났고 내년 1월 취임한 이후에도 국정운영에 반영될 것으로 전망된다. 즉 세부적인 사안은 책임자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국가적 중대사안이나 의회와의 원활한 관계 유지에 전념할 것으로 예상된다.

아버지에 이어 대통령이 됨에 따라 미국 최고의 정치 명가(名家)를 완성한 부시 후보는 원래 돈 많은 집안에서 메이저리그 야구선수를 꿈꾸며 자란 ‘삐딱한 왕자’였다. 상원의원이었던 할아버지 프레스콧 부시와 대통령이었던 아버지 조지 부시의 그림자는 그의 젊은 시절을 깊고 어둡게 가렸다. 그래서 그는 한때 조지 부시의 아들이란 뜻의 ‘조지 부시 주니어’라고 불렸다.

부시 후보는 46년 7월 할아버지가 상원의원으로 있던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에서 태어났으나 2세 때 아버지가 석유사업을 위해 텍사스주 오데사로 이주하는 바람에 텍사스 토박이가 됐다. 그는 명가의 장자였지만 옆집의 창녀 모녀와 화장실을 같이 사용할 정도로 작은 아파트에서 유아시절을 보냈다. 이후 아버지의 사업이 번창하자 인구 2만5000여명의 소도시 미들랜드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부시의 동창생들은 그가 교실에서 장난을 치다 교장실에 끌려가 엉덩이를 맞고 동네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휘젓고 다니는 등 독서보다는 놀기에 열심이었던 장난꾸러기로 기억한다. 특징이라면 유달리 야구를 좋아해 성적은 중간이었지만 야구통계는 모조리 외우는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였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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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보다 놀기 더 좋아해▼

부시 후보의 친구들은 “부시가 중학교 1학년 때 반장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정치적 자질을 드러냈다”고 회고한다. 뉴욕타임스지는 “그가 보통 아이들과 섞여 교육을 받고 자유롭게 자란 게 오늘날 ‘정치인’ 부시 후보의 가장 강력한 힘이 됐다”고 분석했다.

부시 후보는 아버지의 전례를 따라 명문 예일대 역사학과에 진학한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는 정열, 어머니는 유머, 내 특징은 불경함과 조바심”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으며 가문의 엄청난 무게를 못 이긴 나머지 한 때 뒤틀어진 행동을 했다. 여자와 술을 가까이한 것.

선대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반항아 부시의 노력은 군 생활에서 비로소 시작됐다는 게 대학 친구들의 평가. 예일대 졸업을 2주 앞둔 68년5월27일 부시 후보는 텍사스 공군경비대의 F102기 조종사로 군에 입대했다.

군 복무를 마친 뒤 하버드대 경영학석사(MBA)까지 마친 부시 후보는 자신의 생일인 75년7월6일 텍사스주 미들랜드에서 석유사업에 뛰어들어 ‘사회인 부시’로 다시 태어난다. 그렇지만 77년 하원의원에 출마했다 낙선했고 85∼86년 겨울에는 유가폭락으로 사업이 큰 위기를 맞기도 했다.

부시 후보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꾼 계기는 아버지의 대통령 선거였다. 유급 선거자문역으로 일했던 그는 아버지로부터 정치력을 인정받고 자신감을 얻어 본격적인 정계 진출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부시 후보의 35년 지기인 예일대 동창 롤랜드 베트는 “부시 후보는 42세가 되자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벗어나야겠다고 느낀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소송때 인내-일관성 지켜▼

4년을 준비한 끝에 94년 텍사스 주지사 선거에 도전해 53.5%의 득표로 주지사가 된 부시 후보는 드디어 부시 가문의 영광을 이어갈 ‘진정한 장자’로 올라섰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그의 가슴속에 ‘백악관 야심’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일까.

부시 후보의 측근들은 “부시 후보가 98년 주지사 선거에서 68.6%의 득표율로 재선된 후 대선에 도전하겠다는 생각을 굳혔다”고 기억한다. 당시 부시 후보의 마음 속엔 팍스아메리카나의 승계자였던 아버지에게 패배를 안겨준 ‘아칸소 촌뜨기’ 빌 클린턴에게 반드시 아픔을 되돌려주겠다는 각오가 뜨거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미 언론은 부시 후보가 1년이 넘는 대선 유세와 전대미문의 플로리다주 재검표 파동을 치르면서 몰라보게 바뀌었다고 평가한다. 요동치는 판세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대의와 원칙을 존중하는 통이 큰 지도자 기질을 입증했다는 것. 그는 지난달 선거를 며칠 앞두고 이렇게 얘기했다. “오랜 유세기간 중 나는 인내와 일관성의 원칙을 견지했다. 그리고 나는 분명히 강해졌다. 미국 대통령은 단련돼야 한다.”

taylor5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