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영국작가 조지 기싱(1857∼1903)을 처음 만난 것은 1960년대 후반 대학시절의 강의실에서였다. 영어 수필 시간에 기싱의 대표작 ‘헨리 라이크로프트의 수상록’을 강독했기 때문이었다. 영국 특유의 전원적 풍광과 삶의 양태에 대한 뛰어난 성찰을 담고 있는 기싱의 글은 감수성 예민하던 시절, 생수처럼 내 영혼을 적셔주었고, 그 후로도 내 마음속에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당시 기싱을 가르쳐주셨던 은사 박규환교수께서는 77년에 ‘헨리 라이크로프트의 사록(私錄)’ 이라는 제목의 번역본(정음사)을 내셨지만, 문고판이라 완역본은 아니었고 곧 절판되어 구할 수도 없게 되었다.
최근 기싱을 좋아하고 가르쳐오신 또 한 분의 영문학자가 ‘기싱의 고백: 헨리 라이크로프트의 수상록’이라는 제목으로 그 책의 완역본을 출간했다. 33년만에 다시 읽는 기싱은 새로운 감회 속에서 여전히 감명 깊고 감동적이었다.
기싱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인 이 책의 화자로 헨리 라이크로프트라는 가공의 작가를 창조해내었다. 헨리는 런던을 떠나 데번의 전원지방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며, 사회의 병폐를 치료하는 자연의 치유력을 탐색한다. 일기 형태로 되어있는 이 수상록에서 헨리는 각 장을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나누어 사계절에 따른 자연과 인생의 변화를 명상하면서, 자아성찰을 통한 예리한 문명비판과 사회비판을 성취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자연생태주의적인 텍스트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의 보다 더 강력한 호소력은 시공을 초월한 문제의식의 제기에 있다. 예컨대 기싱은 헨리의 펜을 빌어 당대의 과도한 물질주의와 과학기술과 제국주의가 인간성을 타락시킨다고 개탄하고 있는데, 그것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오늘날 우리의 상황과 너무도 흡사하다. 그는 또 학교 교련과 징병제도의 폐지를 주장하기도 하고, 문학과 예술이 상업주의에 의해 오염되는 것을 개탄하기도 하며, “그동안 나는 어디서나 안식을 찾아보았지만, 책을 들고 한쪽 구석에 앉아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아무 곳에도 없었다”라고 책의 소중함을 언급하기도 한다.
“어두워진 뒤 길에서 산책을 하는데 문득 런던의 거리들이 생각났다. 그러자 마음의 변덕 때문이었으리라, 런던에 가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환히 빛나는 상점 진열창, 비에 젖어 노랗게 번질거리는 포장도로, 어디론가 서둘러 가는 사람들, 그리고 마차, 승합차들이 눈에 선해지자 그만 나는 그 모든 것 속에 다시 섞여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유려한 번역 덕분일까, 이런 구절들은 마치 한편의 시처럼 가슴에 와 닿는다.
기싱은 교수가 되고 싶어했지만 본의 아니게 전과자가 되는 바람에 학자가 되지 못했고, 그 결과 오히려 훌륭한 저서를 남기게 되었다. 18세기 이태리의 사상가 비코도, 20세기 중반 독일의 벤야민도 모두 교수가 되려는 꿈이 좌절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기념비적인 저술을 남긴 사람들이다. 지성은 사실 제도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때 위대한 결과를 산출하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급변하는 전환기에 사라져 가는 소중한 것들을 지키며, 삶의 본질을 통찰하려는 지식인의 노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기싱의 명저를 번역한 역자 이상옥 교수 역시 궁극적으로는 그와 같은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기상의 고백/조지 기싱 지음/이상욱 옮김/439쪽 1만2000원/효형출판▽
김성곤(서울대교수·영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