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차 안이나 찻집 같은 곳에서 책을 읽지 못한다. 혼자만의 조용한 장소, 서너 시간 정도의 시간이 확보돼야만 집중할 수가 있다. 많은 양의 책을 읽지 못하므로 책 선택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다행히도 이런 나의 주변에 난독증 환자가 한 사람 있어, 내가 읽을 책들을 먼저 읽은 뒤 불필요한 책을 걸러내주고 있다. 얼마 전 내가 날이 갈수록 글 쓰는 게 어렵고 고통스럽다고 불평하자 그가 골라준 책이 ‘금강경 강해’였다. ‘(행)함이 없음의 복이여!’라니, 무슨 뜻일까.
재작년 해인사에 들렀을 때 팔만대장경에서 정렬한 서기 같은 것이 뻗쳐나와 내 발길을 강렬하게 붙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 기운의 정체에 다가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불경을 뒤적여봤지만, 건성으로 본 탓인지 ‘금강경’에 대한 인상은 단지 소박하고 당연히 좋은 말이라는 것뿐이었다. 더구나 도올이라면, 서문이 책의 반 가까이 차지하는 책을 힘들게 읽은 기억이 있었고 학자로서의 파격을 둘러싼 공방 탓에 약간은 망설여지는 독서였다.
‘금강경’은 원어의 뜻이 ‘벼락경’이라 한다. 청천벽력처럼 내리치는 지혜인 것이다. 그것을 이 책에서는 ‘성경’과의 대비는 물론이고 비트겐슈타인에서 이솝 우화, 베토벤의 교향곡까지 가로질러 독창적으로 해석해놓았다. 자기를 얻는 순간 자기를 버리는 것, 나의 부정과 무아의 경지…. 그동안 단편적으로 알았던 짧은 상식이 도올의 해석을 통해 앞뒤를 갖추고 흐름을 이루는 게 느껴졌다.
한편으로 읽는 내내 투덜거려야 했다. 한때 책 만드는 직업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책의 형식에 관해 까다로운 편인 나는 맞춤법이라는 기본적 약속조차 지키지 않는 무례한 책을 읽기가 쉽지 않았다. 정제되고 함축적인 글 쓰기를 지향하는 작가로서의 나 또한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느낌표가 가득 찍힌 과잉감정과 상식적으로는 책에서 쓸 수 없는 노골적인 표현들, 빈번한 꾸짖음, 동어반복을 참아야 했다. 그러나 허위와 구태의연함을 벗어난 그 파격이 책을 읽게 만드는 힘인 것은 틀림없다.
‘금강경’은 말한다. 강을 건넜으면 뗏목을 버려야 하듯 자신에게 깨달음을 준 부처의 말까지도 버려야만 진정한 무아의 경지에 이른다, 뜻을 잡았으면 이제 언어를 버려야 한다. 이 책을 권한 사람은 내가 이 귀절을 마음속에 풀어놓아 조금이나마 가볍게 글을 쓸 수 있기를 바랐던 걸까. 나의 뗏목도 버려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나무를 자르고 다듬어 최선을 다해 아름다운 뗏목부터 만들어야 한다. 결국은 어서 쓰라는 말이었던 모양이다.
은희경(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