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천님에게 띄운 글에서 이미 밝힌 바 있듯이, 저는 동성연애와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 자체가 부담스럽습니다.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논다고 할까요? 페미니즘에 관한 이런저런 책도 읽고 몇 차례 세미나에 참석하기도 했지만,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20년이나 경상도 머슴아로 자란 까닭에 뿌리깊은 가부장제적 질서가 제 삶에 뿌리내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치고 싶은 부분도 많지만 마음대로 되지가 않습니다.
무서움을 느낄수록 그쪽을 자꾸 힐끔거리는 아이들처럼, 저는 늘 페미니즘과 동성연애에 관심을 가져 왔습니다. 그 동안 모은 자료가 노트 한 권 분량이 넘는군요. 기회가 되면 이것으로 멋진 소설을 한 편 쓰고도 싶습니다.
최근 저의 눈길을 끄는 일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한겨레 21'의 '쾌도난담'을 통해 보여준 김훈 선생의 솔직담백한 발언입니다. 문제가 되었던 발언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난 남녀가 평등하다고 생각 안 해. 남성이 절대적으로 우월하고, 압도적으로 유능하다고 보는 거지. 그래서 여자를 위하고 보호하고 예뻐하고 그러지."
또 하나는 소문으로만 떠돌던 '운동사회 내 성폭력뿌리뽑기 100인 위원회'가 드디어 지난 11일 진보네트워크(www.jinbo.net) 게시판에 성폭력 사례 16건을 자세히 소개하고 각 사건의 가해자들을 실명으로 실은 것입니다. 이 16건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며 더욱 많은 재야의 명망가와 운동가들이 성폭력의 가해자로 논의되고 있다고 합니다.
모순될 수도 있겠지만, 저는 남녀불평등을 주장하는 김훈 선생의 발언과 남녀평등이 보장되는 사회를 위해 발벗고 나선 '100인 위원회'의 입장을 모두 이해합니다. 이것은 배타적으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김훈 선생에게 많은 비판이 쏟아졌지만, 과연 그 돌팔매를 김훈 선생 혼자만 맞아야 하는 것인가 라는 의문도 가져봅니다.
소설을 쓸 때 가장 힘겨운 것 중 하나가 나와 다른 성(性)을 그리는 것입니다. 솔직히 제가 속한 남성은 어느 정도 알겠는데 여성은 도통 오리무중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멋지게 여성의 심리를 파헤쳤다고 생각했는데, 여성 독자들에게 이건 철저하게 남성의 시각에서 본 여성이라는 비난을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땐 억울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 비판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우연의 일치일까요? 월화드라마 '아줌마'와 수목드라마 '여자 만세'는 하나같이 여성들의 복수극입니다. 바람난 남편에게 맹공을 퍼부으며 여성으로서의 삶을 자각해 가는 아줌마를 이틀 동안 본 다음 돈과 명예를 위해 자신을 버린 남자로부터 벗어나 자수성가하는 노처녀의 이야기를 또 이틀 동안 보는 것이지요. 드라마를 방영하는 방송국도 다르고 작가도 다르지만, 공통점은 철저히 여자의 입장에서 여자를 위해 쓰여진 드라마라는 것입니다. 주시청자를 여성으로 택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두 드라마의 방송작가가 모두 여자이기 때문일까요?
노처녀든 아줌마든, 여성의 각성과 홀로서기에 대해 이견을 제기할 뜻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그녀들의 상대역으로 설정된 남성들이 너무나도 우스꽝스럽고 속물적이며 자의식이라고는 전혀 없는 기회주의적 출세지향주의자로 그려진다는 점이 불만이지요. 고통받고 상처 입은 여자주인공들과 대비시키기 위해 어느 정도의 과장이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강석우나 변우민 모두 인간으로서의 부피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만화적인 캐릭터로 떨어질 정도니까요.
이렇게 투덜거리다가, 예전에 제가 만든 여자주인공들에 대해 쏟아졌던 여성 독자들의 비판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김훈 선생이 '일부일처제를 혁파하자!'고 외쳤던 주장의 속뜻도 따져보았지요.
월화수목 10시부터 11시까지를 점령한 여성들의 복수담과 영웅담을 지켜보면서, 얼마나 그 동안 당했으면 저렇게까지 할까 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도 우선 자신이 속하지 않은 다른 성(性)에 대한 배려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100인 위윈회'나 이 글을 읽는 여성 독자들은 또 이런 저의 글을 불쾌하게 받아들이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허나 아줌마 만세, 여자 만만세를 외치며 남자들을 깔아뭉개는 드라마를 보면서 통쾌함을 느끼기보다는 자기 옆에 있는 남편과 남자친구의 속내를 한 번 더 들여다보라고 감히 권하고 싶군요. 경상도 머슴아의 바람은 여기까지입니다.
소설가 김탁환(건양대 교수) tagtag@kytis.ko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