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 휴대통신 서비스 IMT-2000 사업자가 사실상 결정된 것은 발표 당일인 15일 0시반경이었습니다. 정보통신부 석호익 지원국장은 14일 저녁을 먹고 난뒤 천안의 정보통신공무원교육원에서 18명의 심사위원들로부터 개별평가 결과를 제출받았습니다.
1인당 20여분씩 모두 받고나니 날이 넘어가 15일이 되었답니다. 검산을 거쳐 윤곽이 확정된 것은 0시반이었다고 석국장은 기억했습니다. 그런데 안병엽장관은 "내가 보고받은 것은 15일 오전8시40분"이라고 정확히 말했습니다.
약 8시간동안 재계의 판도를 좌우할 IMT-2000의 선정결과는 봉투 속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 셈이지요. 과연 석국장은 이같은 결과를 8시간 동안 청와대를 포함, 아무에게도 보고하지 않았을까요?
1년6개월여 동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사업권의 주인이 가려졌습니다. 새해부터는 IMT-2000을 둘러싼 사업권 경쟁 국면이 끝나고 상용화 경쟁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게 됩니다.
사업권을 신청한 4개 법인중 SK텔레콤과 한국통신이 사업권을 따냈습니다. 비동기 경쟁에서는 LG글로콤이 탈락의 비운을 맞았고,동기식에 단독지원한 하나로통신의 한국IMT-2000은 과목낙제의 벽을 넘지못해 떨어졌습니다.합격자를 내지못한 동기식은 내년 2월말 사업자를 새로 선정할 예정입니다.
4개 사업자가 3장의 티켓에 도전해 경우의 수는 많지 않았지만 심사결과에 대한 관심은 지대했습니다.누가 되느냐에 따라 향후 통신시장의 판도가 달라진다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또 나아가 재계의 판도까지 좌우할 정도로 국내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큰 사안이었습니다.
발표당일…극도 보안속 장관 심사위원도착 첩보전 방불
이러한 관심을 반영해 발표당일 발표장 주변은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뤘습니다.발표 한시간전부터 몰려든 취재진은 2백여명에 달했습니다.각 방송사의 생중계 인원과 장비까지 동원돼 발디딜틈도 없었고 소란스럽기도 그지없었습니다.
동시에 배포된 사업자 선정결과 자료를 단 1초라도 먼저 차지하려는 경쟁도 볼만했습니다.취재진들은 자료 배포 직전 장관이 최종 선정 결과를 보고받는 동안 장관집무실 밖에 진을치고 결과를 기다렸습니다.공보관이 정보통신정책심의원회와 취재진에게 동시에 배포될 자료를 들고 장관실을 나오는 순간에는 자료를 먼저 차지하려는 취재진이 몰리면서 언성을 높이는 광경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막상 자료를 받아든 취재진들은 휴대전화로 결과를 숨가쁘게 타전했는데 전화연결이 되지 않거나 인터넷 기사게재가 안돼 발을 구르는 모습도 곳곳에서 보였습니다.
심사장소인 천안 정보통신공무원교육원에서 심사위원단과 발표자료를 가져오는 과정도 첩보작전을 방불케 했습니다.심사위원들은 전날 개별 채점을 끝내고 밤샘작업으로 이를 세차례에 걸쳐 합산해 오전 승용차편으로 서울 광화문 정통부에 도착했습니다.
취재진은 이들의 도착장면을 잡기 위해 정통부 로비에서 진을 쳤지만 심사위원단 6명과 정보통신부 석호익지원국장을 태운 차량은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와 평소에는 운행되지 않던 엘리베이터를 비상 가동시켜 이용함으로써 취재진을 따돌렸습니다.물론 오전 일찍 출근한 안병엽장관도 같은 코스를 이용했습니다.
LG탈락이유 석연치 않아
탈락한 LG의 경우 기술점수가 의외로 낮게 나와 취재진을 놀라게 했습니다.LG는 그동안 비동기식 기술개발에 가장 일찍 뛰어들어 국내 업체로는 유일하게 내년중 상용시스템 개발을 앞둔 LG전자가 포진했다는 점에서 볼 때 다소 의외의 결과였습니다. 사실 LG의 비동기식 분야 기술우위성은 자타가 공인하는 것이었죠.
LG는 서비스 및 설비계획,재정적능력 등 2개 항목에서 한국통신IMT에 0.32점 앞섰으나 강할 것으로 예상한 기술적 능력에서 1.30점이나 뒤져 0.98점차의 고배를 들어야했죠. LG의 기술점수는 80.714점이었던 반면 한통과 SK의 점수는 각각 84.286점, 86.571점이었습니다.
LG는 이같은 심사결과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습니다.동기식 사업권에 재도전하는 것은 나중 문제고 시비를 가리겠다는 얘기죠.비동기식 기술력에서 가장 앞서있는데도 기술개발실적,계획 및 기술적 능력에서 뒤지는 것으로 채점된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발표장에서도 이 대목에 질문이 집중됐습니다.곽경섭 심사위원(인하대 교수)은 "LG는 사업계획서상 3년치 기술실적을 제출한 반면 타 업체들은 6년간의 실적을 제출했기 때문에 LG에 상대적으로 낮은 점수가 매겨졌다"고 설명했습니다."LG의 경우 데이콤등과 관련 과거 기술실적이 많은데 제출되지 않아 평가에 불이익을 받았다"는 설명도 덧붙였습니다.
즉각 "평가에 주관적 편견이 개입된 것 아니냐,심사가 작문능력 검사냐"는 질문이 쏟아지자 문송천심사위원(KAIST 교수)은 "기술개발 실적 기간때문에 점수가 낮게 됐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심사위원 개개인은 최근 개발실적,비동기 부문 실적에 대한 가중치를 두고 심사에 임했다"며 부랴부랴 진화에 애쓰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반면 서비스 및 설비계획 항목중 기술적 요소가 많이 개입된 '장비조달을 위한 국내외 장비제조업체와의 협력계획'평가의 경우 LG가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아 일관성이 없다는 인상을 풍겼습니다. LG의 점수는 80점으로 한통(72.429)과 SK(76.143)을 크게 앞섰는데 왜 비슷한 기술적 능력 평가에서는 꼴찌를 했는지 의문이 남습니다.실제 사업수행능력보다는 예상치와 실적,숫자 등을 보기 좋게 나열한 '작문 능력'에 치우치기 쉬운 사업계획서 심사방식의 문제점을 잘 드러낸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통부 삼성전자 "최악의 시나리오"
LG의 반발도 반발이지만 국내 통신사업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이번 사업자 선정 결과는 예상됐던 카드중 최악의 것이기 때문입니다.물론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것은 정통부입니다.정통부는 IMT-2000사업권과 관련 줄기차게 CDMA에 뿌리를 둔 동기식 기술을 사장시켜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견지해왔습니다.
이같은 정책 기조에는 한국이 가장 먼저 상용화한 CDMA는 국내 통신산업 성장의 원동력이자 CDMA 도입의 성공은 정통부 최대의 치적이라는 의식이 깔려 있습니다.여론의 화살을 맞으면서까지 기술표준을 업계 자율에 맡기겠다던 정책을 동기 사업자 유도로 바꾸고 사업계획서 마감기한을 연기한 것 등은 강력한 동기사업자를 반드시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득은 신통치 못할 전망입니다.동기시장 유지 발전을 위해서는 강력한 동기사업자 육성이 필요한데 휴대전화 시장의 꼴찌 사업자인 LG가 동기사업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죠.
전문가들중에는 벌써부터 양대 비동기 사업자의 틈속에서 동기시장은 얼마 못가 사라질 것이라는 예상을 내놓는 사람도 있습니다.동기용 장비시장에 기대를 걸어온 삼성전자로서도 고민스러운 상황입니다.삼성전자는 내심 SK텔레콤 같은 1위사업자가 동기사업자로 선정돼 동기장비 시장의 호황이 계속되기를 기대해왔습니다.그러나 LG글로콤에는 라이벌 LG전자가 포진하고 있어 LG가 동기사업자가 되면 장비납품은 꿈도 꾸지 못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모든 사업자가 비동기로 가는게 중복투자도 막고 기술집적도도 높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올 정도입니다.석호익지원국장은 그러나 "비동기식은 과대포장돼 있다.동기식 서비스를 빨리 시행하면 비동기식을 압도할 수 있다"며 "특정기업이 정책목표에 맞더라도 심사과정에 이를 반영하면 더 큰 문제가 됐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정통부는 이번 사업자 선정 작업에서 정통부의 입김이나 외압이 배제된 투명ㆍ공정성 강조에만 집요하리만큼 집착함으로써 추후 발생할 지도 모를 책임추궁의 여지는 줄인 것으로 보입니다.하지만 그 결과 통신산업 전반의 기반을 약화시켰다는 지적을 피해가기는 어려울 전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