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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임수경 격정토로 ②

입력 | 2000-12-22 16:42:00


나는 덮어주려 했는데…

―학생운동 시민운동 등 과거 각 분야에서 운동을 한 사람들이 한때 유행처럼 정치권에 진출했고, 지금도 꾸준히 그런 움직임이 있는데, 정치권에 진출해 좋은 평판을 듣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운동권의 좌절 또는 변절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그런 현상을 어떻게 봅니까?

“전문성의 문제라고 봐요. 특정 학문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것만이 전문성은 아니잖아요.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행동하고 실천해온 그 전문성을 바탕으로 제도권 정치에 진입하는 사람들도 있어야지요. 물론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사람들도 있어요. 개인의 선택 문제죠. 제도권 진출은 무조건 나쁘다, 시민운동을 끝까지 한 사람은 무조건 옳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 않아요?”

―그런 점에서 임수경씨가 소외된 측면이 있다는 얘기도 들리는데요.

“저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주변에서 정치권으로 가겠다는 사람들한테 ‘그래, 가서 열심히 잘해라’ 그랬지만, 저 자신은 전혀 그런 쪽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어요. 내가 나를 아니까. 나의 능력과 나의 품성과 나의 기질을 아니까.”

―혹시 제의 받아본 적은 없어요?

“그게 중요해요? 얘기해야 돼요? 구체적으로 밝히고 싶지는 않지만 제의를 받은 적은 있죠. 그렇지만 제 생각이 워낙 확고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든 살면서 한두 번은 ‘운명적’이라 할 만한 사건을 겪게 된다. 임씨의 방북사건이 그랬다. 그 사건은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난 평범한 운동권 여대생을 ‘통일의 꽃’으로 만들어버렸다. 본의 아니게 ‘꽃’이 된 그녀는 ‘꽃답게’ 살아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됐다. 남쪽이든 북쪽이든 적어도 통일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그녀의 이름은 희망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1989년의 임수경씨 방북사건은 통일운동사에서 상당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봅니다. 당시 자신의 행동을 지금 관점에서 평가한다면?

“결과가 다 말해주지 않나요. 개인적으로 후회는 전혀 없어요. 당시 정세에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일이 남북관계에 끼친 영향이 크잖아요. 지난번 남북정상회담 때만 해도 사람들이 모여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불렀단 말이죠. 그 노래를 북한에 처음 퍼트린 게 저예요. 제가 북한에 머물 당시 북한에서 이 노래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어요. 북한 방송에선 매일같이 9시 뉴스 직전 그 노래가 흘러나왔어요. 그런 것이 비록 작은 부분일지 몰라도 남과 북이 함께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봅니다.

제가 감옥에 있을 때 고위급회담이다 뭐다 하면서 양쪽 사람들이 왔다갔다 했는데, 북한에 가면 그 사람들이 꼭 묻는 말이 ‘임수경 학생은 언제 석방됩니까’였어요. 우리 정부에서는 그걸 정치적인 행위로 간주했지만, 그런 게 아니죠. 임수경의 안부를 물어볼 수 있는 마음이 중요한 거죠. 일종의 공감대 형성이라고 봐요. 앞서 제가 얘기한 대로, 통일을 이루는 데 우선 필요한 것은 마음의 장벽을 허무는 일인데, 이를 위해선 차츰 공감대를 넓혀가는 작업부터 해야 합니다.

―그때만 해도 북한에 몰래 들어가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 아닐 수 없었지요. 어떤 생각, 어떤 각오였습니까.

“어떤 거창한 각오 같은 건 없었어요. 22살 대학 4학년으로서 분단의 현실에 조금은 가슴 아팠던 거죠. 그 시기 젊은이들만이 느낄 수 있었던 순수함이 바탕이었던 것 같아요. 남과 북이 있는데, 어렸을 때부터 북한을 빨간색으로만 보고 자라던 젊은이가 분단의 현실에 눈뜨면서 또 하나의 조국인 북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고, 그들과 통일 문제를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으로 갔던 겁니다. 나중에 국가보안법으로 처벌은 받았지만, 저의 행위는 통일로 가는 길에 놓인 중요한 디딤돌로 평가받을 것이라고 믿어요. 특히 민간인으로는 처음으로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는 점이 중요해요. 뒷날 활발해진 판문점 왕래에 단초가 된 것이죠.”

―80년대 학생운동의 중심 축은 5·18에 대한 분노였다고 봅니다. 그 와중에 흔히 주사파로 불리는 극단적인 형태의 운동권도 생겨났죠. 주사파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주사파가 무슨 행동을 했죠?”

―한마디로 북한의 주체사상에 흠뻑 빠진 것 아닙니까. 우리 사회의 주류 정서에 비춰보면 맹목적인 친북 성향을 띤 것이죠. 5·18에서 촉발된 정권에 대한 분노, 한쪽 조국에 대한 배신감이 나머지 한쪽의 조국, 곧 북쪽에 대한 기대와 경도로 나타난 것 아닐까요.

“그렇게 볼 수도 있죠. 그렇지만 다양한 철학과 다양한 사고가 나올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죠. 그것이 처벌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고 봐요. 그런데 당시에는 그런 학생들을 잡아 가두려고만 했기 때문에 오히려 극단적인 행태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거죠.”

김영환과 황장엽의 과오

―그 문제를 꺼낸 것은, 주사파의 대부라 할 김영환씨의 행태를 어떻게 보는지 묻고 싶어서입니다. 김씨는 전향한 후 ‘수령론은 거대한 사기극’이라며 ‘시대정신’이라는 잡지를 통해 공공연히 김정일 정권 타도와 흡수통일을 주장합니다. 누군가의 표현대로라면 극에서 극으로 돌아선 거지요.

“그들은 책임을 져야 해요. 물론 개인적인 과오를, 시대를 따랐던 많은 사람들의 과오로 보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나도 학생운동할 때 김영환 선배 영향을 참 많이 받았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이 노동당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느낀 배신감이란 것은―그때 나는 미국에 있었는데―굉장한 참담함이었어요. 저는 다양한 사고방식을 인정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주체사상을 따르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그렇지만 대중에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죠. 김영환씨는 80년대 학생운동의 한 축이었습니다. 저는 그의 노동당 입당은 민중에 대한 배신행위였다고 생각해요. 그에게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에 대한 배신행위죠. 영향력이 없는 사람들의 입당이나 월북, 귀순이야 개인의 선택으로 볼 수도 있지만, 김영환처럼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은 그에 대한 책임을 두고두고 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학생운동권 일부에 내재하는 사회주의에 대한 열망을 얘기하다가 황석영씨의 신작 ‘오래된 정원’이 화제에 올랐다. ‘오래된 정원’은 5·18이라는 역사의 급류에 몸을 던진 80년대 초 운동권 젊은이들의 투쟁과 사랑을 그린 것으로, 지난 5월 작가 황씨가 “조선일보가 주는 상을 받을 수 없다”며 동인문학상 심사대상이 되는 것을 거부해 화제가 된 작품이다. 임씨는 “재미없지만 끝까지 읽었다”며 까르르 웃었다.

―‘오래된 정원’을 보면 학생운동과 관련해 이런 표현이 나오죠. 윤희라는 여주인공의 얘기인데, ‘대개 사회적 보상욕구가 큰 가난한 젊은이들이 동아리를 만들고 거기서 권력을 실험하다가 적당한 때가 되면 재빠르게 자기 변신을 한다’고.

“윤희의 한계죠. 윤희는 운동권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윤희도 현우(남자 주인공)의 삶과 행동에 대해서는 굉장히 높게 평가하지 않아요?”

―학생운동권의 권력화 또는 운동권의 변절을 작가가 윤희의 입을 빌려 비판한 것은 아닐까요.

“그럴 수 있겠죠. 그런데 사회적 보상욕구가 큰 가난한 젊은이들이라는 표현은 좀….”

―임수경씨는 가난하지는 않았죠?

“(윤희의 시각은) 학생운동권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의 보편적 시각이에요. 그런데 보상욕구가 큰 사람들이 자기 희생을 무릅쓰고 그런 식으로 할 수 있을까요?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갖는 하나의 편견인 거지. 자기 의견을 강하게 주장할 용기가 있는 사람들, 잘못된 일을 지나치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개인적 삶 외에 어떤 공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학생운동을 한다고 생각해요.”

방북사건이 터졌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서울지하철공사의 고위간부였다. 그후 승진에서 계속 밀리는 불이익을 당했다고 한다. 정년을 앞두고 관리이사로 승진했다가 조순 서울시장이 물러날 때(1997.9) 해고당했다. 지금은 아리랑TV 감사를 맡고 있다.

화제를 통일 문제로 돌렸다. 새로운 통일운동을 하겠다는 그녀의 통일철학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통일문제에 관한 한 그녀는 나름의 영역과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현 정부의 햇볕정책은 대립 일변도의 기존 남북관계를 개선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에 반대하거나 시비를 거는 세력의 목소리가 높은 것이 현실 아닙니까. 황장엽 파동은 그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큰데, 황씨의 대북정책 비판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황장엽씨가 남북한 민중에게 사죄해야 할 날이 올 겁니다. 386사건에 대한 생각과 비슷한데, 비판과 싸움이라는 건 강자에 대항할 때 의미가 있는 거예요. 북쪽에 있을 때는 상대가 너무 강해 싸울 형편이 아니었다고 항변할지 모르지만 그 강자를 적으로 두고 있는 곳으로 넘어와 그들을 짓밟는 건 싸움이 아니죠. 북에서 문제가 있어 남쪽으로 오면 귀순자 환영대회 해주고, 생활비 지원하면서 마음대로 북한을 비판하게 하는데, 그런 비판은 가치가 없는 거죠. 남에서 북으로 넘어간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전혀 귀담아 들을 만한 얘기가 없다고 봅니까.

“귀담아 들을 만한 얘기는 있겠죠. 그래도 그쪽 분야를 연구하고 고민하는 사람이니까. 그렇지만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그 사람은 이미 자신의 영향력을 스스로 떨어뜨렸거든요. 미국이든 중국이든 일본이든 제3국에서 그런 얘기를 한다면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겠지만, 안기부(국정원) 보호 아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적절한 비판을 할 수 있을까요.”

―현 정부 들어선 오히려 국정원과 대립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모르는 거지. 그 속을 누가 알겠어요?”

―현 정부가 북한의 인권 문제나 군축 문제에 대해 전혀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그건 차후의 문제예요. 지금 논의할 과제가 아니라는 거죠. 이제 겨우 두 정상이 만났어요. 그리고 남과 북이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는 법과 제도가 그대로 남아 있어요. 선결과제가 얼마나 많은데, 지금 그런 문제를 제기하는 건 그야말로 극우의 논리죠.”

정부 독점이 문제다

―성급한 사람들은 벌써부터 정상회담 이후의 남북 대차대조표를 따집니다. 결론은,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너무 많고, 그쪽 비위 맞추기에 바쁘고 그쪽 의도에 끌려가고 있다는 거죠. 따라서 이런 방식은 통일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폅니다.

“그 사람들 주장 중엔 남쪽이 우월하니까 흡수통일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 않은가요. 그 논리에 따르면 우월한 쪽이 주는 게 당연하지 않나. 그 사람들 논리에 모순이 있는 거죠. 왜 끌려 다니느냐고 하는데 거꾸로 생각하면 시혜를 베풀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저는 통일에 대한 기본적인 가치관의 차이라고 봐요. 통일을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한. 분단되고 50년이 지났어요. 현정부의 통일정책에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 시작단계를 두고 비판의 강도가 너무 센 것 같아요.”

―현 정부의 통일정책을 열렬히 지지하는 편입니까.

“열렬하지는 않아요. 지지도 아니고. 다만 인정할 뿐이에요.”

―문제점을 지적한다면?

“좀더 과감하게 가도 될 것 같아요.”

―지금도 시끄러운 마당에 난리가 날 텐데요.

“법과 제도 정비가 뒤따라가야 한다는 뜻이에요. 정책은 열렸는데 그것이 정부와 관련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여전히 국가보안법에 의해 처벌을 받고 있어요. 그러니 통일을 원하는 쪽, 원하지 않는 쪽 양쪽 모두로부터 비판을 받는 거죠.”

―통일을 정략적으로 이용한다는 비판도 있지요.

“김대통령의 통일정책이 왜 힘든 줄 아세요? 독점하니까, 정부가 다 쥐고 하니까 힘든 거예요. 그걸 나눠야 해요. 통일정책에 호의를 갖고 있고 정말 의욕적으로 참여하고 싶은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분위기를 만들면 안 돼요. 정부 독점에서 벗어나야 해요. 제가 앞으로 벌이려는 ‘통일21 캠페인’도 그런 차원이에요.”

―통일문화재단을 만들려면 돈도 필요할 텐데,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있죠. 남북간 문화교류가 활발해지고 있지만 좀더 다양하게 이뤄져야 해요. 학생들이 금강산이나 개성에 캠핑을 가고 북한 대학생들을 남쪽에 초청할 수도 있어요. 이런 일들은 기본적으로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할 수 없지요. 정부 차원에서는 남쪽이나 북쪽 모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요. 저만이 갖고 있는 달란트가 있을 거예요. 북한에서 저에 대해선 어느 정도 신뢰와 애정을 갖고 있다고 보거든요.”

한국외국어대 불어과 4학년에 재학중이던 임씨가 동독을 거쳐 북한에 들어간 것은 1989년 7월.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로 참석한 것이다. 방북기간은 45박46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한 임씨는 바로 구속돼 1심에서 징역 10년에 자격정지 10년을 선고받았다. 이듬해 6월 항소심 재판부는 징역 5년으로 감형했고 대법원은 임씨의 상고를 기각, 5년형이 확정됐다. 그녀는 1992년 12월 특별가석방으로 풀려났다.

―옥살이를 통해 뭔가 깨닫거나 배운 것이 있다면요?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다스리는 것을 배웠던 것 같아요. 다스려질 수밖에 없지요, 뭐. 이야기하고 싶어도 못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못 만나고, 읽고 싶은 책도 못 읽고… ‘할 수 없다’라고 규정되는 생활의 연속이니. 감옥에 있을 때 제 나이가 22살에서 25살이었어요. 그 나이 때면 누구나 뭔가 하고 싶다고 갈망하잖아요. 그런데 ‘할 수 없다’로 규정된 곳에 있다보니 그 갈망을 가라앉히는 게 쉽지 않았어요.

이걸 맞서 싸우느냐, 아니면 나를 다스리며 다른 방법을 찾느냐. 그런 갈등이 있었지요. 처음에 서울구치소에 있을 때는 주변에 양심수들이 있어 외롭지 않았어요. 그러다 청주여자교도소로 이감돼 혼자 있게 됐지요. 집단적으로 있을 땐 막 싸우고 그랬는데 혼자 있다 보니 ‘저 교도관을 인간적으로 감화시켜 또는 잘 구슬려서 책을 한 권이라도 더 보자’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처음엔 분노―공권력 앞에 한없이 무력한 나 자신에 대한 분노 때문에 많이 힘들었어요. 울화랄까 고통이랄까. 기도를 통해 그런 것들이 조금씩 다스려졌지요.”

―뉘우치는 일은 없었겠지요, 물론?

“왜 뉘우쳐요. 나를 가둔 공권력을 향한 분노 때문에 고통스러웠어요. 고 문익환 목사님은 항상 감옥에 있는 게 즐겁다고, ‘하나님 나에게 왜 이렇게 축복을 주시냐’고 늘 감사기도를 드렸다는데, 나는 나이가 어려 그런지 ‘왜 나에게 고통을 주냐’고 기도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감옥에서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았던 것 같아요. 나 자신을 다스리는 법이라든가, 책도 많이 읽었고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도 알게 됐고.”

―많이 울지는 않았습니까.

“그러진 않았어요. 면회 때 가끔 우는 정도였어요. 극한상황에는 눈물이 나오지 않는 것 같아요. 안기부에서 조사 받고 검찰로 넘어가기 전날 엄마를 면회시켜 줬는데, 엄마는 우는데 나는 눈물이 안 나오더라고요. 그것 때문에 또 얼마나 혼났는데. 독한 년이라고. 그런데 저 사람들한테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고싶지 않더라고요. 눈물 흘릴 만큼 마음에 여유가 없었던 거죠. 바싹 긴장한 탓도 있고.”

약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아

―모욕감 같은 건 없었습니까.

“약한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잠자는 모습도 보이고 싶지 않아 잘 때는 이불을 뒤집어썼어요.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에서 벗어나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교도관과 늘 일대일로 대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더했지요. 청주여자교도소에선 사동 한 층에 나 하나밖에 없었어요. 운동도 혼자 하고. 특급 요시찰 인물로 격리대상이었거든요.”

―평상심 회복이 쉽지 않았던 것 같군요.

“서울구치소에서 1년 지낼 땐 재판 받으러 다니느라 그럭저럭 넘어갔는데 청주에서는 좀 힘들었어요. 3년을 넘기고 나니 많이 힘들더라고요.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 싶을 때 나온 것 같아요.”

―옥살이 후유증 같은 건 없었습니까.

“한동안 혼자 다니는 게 무섭고 버스나 전철을 타면 어지러웠어요. 영화 ‘쇼생크 탈출’을 보면 주인공이 탈옥한 후 길을 걸을 때 누군가 따라오는 사람이 없나 자꾸 뒤돌아보잖아요. 내가 그랬던 것 같아요. 혼자 자유롭게 걸어다니는 것이 믿기지 않더라고요.”

―통일운동권에서 갖게 된 자신의 위치가 부담스럽진 않았습니까.

“처음엔 굉장히 부담스러웠어요. ‘통일의 꽃’도 그렇고. 한동안 그러다 어느 순간 내 것으로 받아들이자 생각했어요.”

―부모님이 방북계획을 알았다면 말렸겠지요.

“당근(‘당연하다’는 뜻의 신세대 용어)이지요.”

―자라온 환경도 그렇고.

“자라온 환경이 그래서가 아니라 어느 부모라도 말릴 일이지. 당근을 자꾸 얘기하시네.”

임씨는 “우리 가족들한테 정말 고맙다”며 가족에 대한 애정을 표시하는 걸 잊지 않았다.

“언니가 어느 인터뷰에서 그런 얘기를 했더라고요. 하느님이 우리가 고통을 견뎌낼 줄 알고 고통을 주신 거라고. 아버지는 지금도 언론보도에 민감해요. 저와 관련된 기사는 일일이 체크하시지요. 스크랩북이 수십 권이에요. 엄마는 늘 ‘임수경, 나 없으면 어떻게 살래’ 하세요.”

―가장 믿음직한 동지네요.

“그냥 믿어주시는 것 같아요. 아픈 일 있으면 더 아파하시고. 언니는 제가 감옥에 있을 때 가장 든든한 친구였어요. 직장에서도 잘렸죠. 임수경 사건 3일 만에. 우리 딸이, 내 동생이 절대 나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셨던 것 같아요. 나중엔 자랑스러워하시고. 지금도 격려해주시고.”

가장 믿음직한 동지, 가족들

임씨는 “요즘 힘있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며 최근 버스에서 겪은 일을 들려줬다.

“엊그제 이쪽(구기동)에서 광화문 가는 버스를 탔는데 기사 아저씨가 ‘아 잠깐’ 하고 소리를 질러요. 그래서 속으로 내가 뭘 잘못했나, 하고 돌아보니 ‘임수경씨죠? 차비 내지 마!’ 그래요. 목소리도 크고 덩치도 큰 분이었는데, ‘운동권 사람들이 다 변절했지만 임수경씨는 변함없는 것 같다. 힘내라. 우리 희망이다’ 뭐 그런 말씀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더라고요.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내렸는데, 운전대를 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악수까지 건네고. 그 아저씨가 버스 안에서 큰소리로 ‘이혼도 했죠?’ 하고 묻는 바람에 창피하기도 했지만, ‘아, 이렇게 나를 지켜보며 지지하는 분들을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를 지켜보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운 때는 지났거든요. 오히려 고마워요. 그분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내가 이 사회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 돌이켜보면 그동안 사회의 주변부를 맴돌았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스스로 많이 위축됐고. 지금은 별로 무서운 게 없어요. 작년에 미국에서 아기와 떨어져 혼자 살며 참 힘들었거든요. 이제 이혼 문제도 정리됐고 아기 문제도 정리돼 홀가분해요. 자신감이 생겼어요.”

―버스 기사 말대로 운동권의 변절을 많이들 얘기하는데, 임수경씨도 주변에서 그런 일을 많이 겪었습니까.

“많이 겪었죠. 그런데 저는 변절이라기보다 변화라고 생각하고 싶어요. 사회가 변화하고 삶이 그만큼 다양해졌으니까. 누구든지 변화하는 거고, 누구나 전선에 설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냥 그렇게 이해하고 싶어요. 섭섭한 것은 있지만요.”

―어떤 점이 섭섭합니까.

“영향력 측면에서죠. 꼭 그 길은 아니더라도 그 마음만은 변치 말아야 하는데…. 뭐 그런 거죠. 그런데 사회가 워낙 냉혹하니까 그렇겠지, 하고 생각해요.”

―그걸 사회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지 않을까요.

“운동권 사람들한테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지 마세요. 그냥 과거에 그런 길을 걸었다는 것만으로 평가하면 좋겠어요. 그들 개개인의 인생을 책임질 것도 아니면서. 지금 뭘 좀 잘못했다고 해서 과거 고생한 것까지 매도하면 안 된다고 봐요.”

―대다수 소시민은 자기 삶을 살기에 바쁘지요. 그러면서도 사회개혁을 위해 애쓰거나 뭔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에 대해선 기대감을 품고 있어요. 그래서 도덕성 잣대도 들이대고.

“저만 해도 이제 아기 데리고 먹고살아야 하잖아요. 생존 문제에 이르면 개인은 또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 부분에 대해선 모른 척하면서 도덕성만 요구하는 건 문제라고 봐요. 물론 저는 생활비는 벌고 있어요.”

임씨는 가방에서 의료보험증을 꺼내 보이며 웃었다. “나 직장 있어요. 매달 갑근세도 내고 있고.” 그러나 직장이 어디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임씨가 결혼한 것은 1995년 1월. 대학원(서강대 언론대학원)에 다닐 때였다. 1998년 11월부터 별거에 들어간 임씨 부부는 이듬해 8월 이혼신고를 냈고, 그해 10월 법적 절차를 마무리지었다.

“아픈 것 없어요.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 중 하나라 생각해요.”

―그래도 결혼할 때는 자신의 행복을 찾는다는 느낌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글쎄요. 그래보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이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가 아니라 그냥 결혼이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그냥 옆에 있는 사람과 결혼한 거죠.”

―무엇이 가장 큰 갈등 요소였습니까.

“법적으로 혼인파탄사유라는 것이 있잖아요. 그에 해당되는 부분이 많았어요.”

임씨는 “거기까지만” 하면서 구체적 이혼사유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용기가 없었어요. 임수경이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혼한다고 손가락질 받을까봐. 그런 것에서 벗어날 수 잇는 용기가 필요한 것 같더라고요, 특히 여자들은. 이혼을 권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닌 건 아닌 거예요. 오늘 아닌 것은 내일도 아닌 거고. 1년 후나 10년 후나 똑같다면, 그렇게 고통스러운 게 어디 있어요. 그런데 이혼한 여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문제예요. 이혼한 여자가 있으면 이혼한 남자도 있는 건데, 남자에 대해선 별로 뭐라고 안 하잖아요. 왜 당당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 미루었나. 후회가 돼요. 좀더 일찍 정리했더라면 빨리 내 자리를 찾았을 텐데.”

이혼을 당당히 받아들여야

조금 난처하다 싶을 질문을 던졌다.

―주변에서 임수경씨에 대해 좋지 않은 얘기들이 종종 들려요. 오만하다느니 건방지다느니 실망했다느니… 특히 운동권 주변에서 그런 얘기들이 들리던데, 왜 그런 얘기가 나올까요.

“오만해요, 제가? 오만하고 건방져요, 제가? 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해요. 운동권 사람들이라고 내가 다 알지는 못해요. 제가 아는 사람보다 저를 아는 사람이 더 많거든요. 피상적 측면만 보고 그런 얘기를 하는 것 같아요. 저는 ‘예, 아니오’가 분명하거든요. 그동안 여성문제에는 별관심이 없었는데 최근 많이 느끼고 있어요. 우리 사회에는 능력을 가진 여성들을 평가절하하는 분위기가 있어요. 그런 점도 작용하는 것 같고.”

―꾸미지 않고 내키는 대로 말하는 직선적인 성격이 오해를 낳은 건 아닐까요.

“좋고 싫은 것을 분명히 구분해 말하니까 그런 평판이 나올 수도 있겠죠. 제가 특정 조직에 매이고 싶지 않은 것도 예, 아니오를 분명히 하고 싶어서예요. 나는 아니라고 보는데, 조직 입장에 따라 ‘예’라고 해야 하는 상황을 피하고 싶어서.”

임씨는 “저는 굉장히 겸손하고 인간적이고 눈물도 많고 정도 많은데…” 하면서 웃었다.

―자신은 별생각 없이 얘기하거나 행동한 것이 다른 사람한테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많지요.

“그런 측면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그것이 내 위치를 세우는 버팀목이에요. 그것마저 없었다면 거의 이리저리 끌려 다녔을 거예요. 제 삶의 위치를 스스로 규정지었다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규정한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나 자신을 세우는 방법에 대해 여러 평가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인터뷰를 끝내며 새삼 느낀 것은 그녀가 참 당당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간의 일부 평이야 어쨌든 건강한 의식을 갖고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점은 기자가 1989년의 방북사건에 대해 ‘운명적’이라는 표현을 쓰자 그녀가 다음과 같이 대답한 데서도 엿볼 수 있었다.

―운명적인 방북사건이 이후의 삶을 규정지은 것 같은데요. 자신의 운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운명이라기보다 의지일 것 같아요. 능력은 약하지만 내가 할 일이 분명히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피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힘을 모아 세력화해갈 시기도 됐고 또 그만한 나이도 된 것 같아요.”

mairso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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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임수경 격정토로 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