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천년을 연 팡파르와 함께 화려하게 시작된 2000년이 믿을 수 없을 만큼 곤두박질 친 경기와 서민들의 긴 한숨에 묻혀 저물어가고 있다.
몇 달 전부터 나돌던 제2 경제위기설은 이미 '설'이 아닌 현실로 드러나고 있으며, IMF 경제난이 본격화된 2년 전보다 체감경기가 더 나쁘다는 소식도 들린다. 경기가 이 지경이고 보면 새 천년 한국의 희망대였던 IT산업도 성적표를 꺼내 보기에 앞서 겁부터 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올해 IT산업은 낙제점에 가깝다. IMF 위기 탈출의 유일한 대안으로 천정부지 몸값이 치솟던 벤처기업은 지난 4월을 넘기면서 거품이 빠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제2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위상이 움츠러든 상태다.
연초 266포인트에서 출발한 코스닥지수도 1년이 채 안돼 50포인트 대로 추락, 연일 전세계 증시 최고의 하락률을 갈아치우고 있다. 최근에는 정현준-진승현씨 같은 젊은 벤처기업인들이 정치권과 손잡고 거액의 머니게임을 벌였다는 사실이 불거지면서 벤처기업이 거대한 의혹 덩어리로 떠오른 형국이다.
수출 효자노릇을 해오던 D램 반도체 가격도 지난 여름 이후 맥을 못추고 있다. 올 상반기 한때 최고 9.38달러에 거래되던 64메가SD램은 최근 3분의 1 선으로 가격이 꺾여 3달러 초반에 팔리고 있다. 이 때문에 삼성전자는 물론, 기업 구조조정으로 LG반도체를 인수한 현대반도체조차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무선인터넷과 초고속인터넷 분야에서 폭발적인 신장이 이뤄져 아주 구겨질 뻔했던 IT산업의 체면을 살렸다는 점이다. 무선인터넷은 올 한해동안 1000만명이 넘는 이용자를 확보해 5년간 1600만 이용자를 모은 유선인터넷을 위협했으며, 초고속인터넷은 ADSL의 확산에 힘입어 올 한해 400만 가입자를 유치하는 등 기염을 토했다.
또 12월들어 IMT-2000 사업자와 디지털 위성방송 사업자가 선정되면서 통신업계에 새 바람을 불어넣지 않을까 기대를 모으고 있다.
비록 올해 IT산업이 부진을 면치 못했다 하더라도 새해에 경기회복의 견인차가 되줄 것을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자원빈국이라는 태생적인 한계 탓에 IT산업 외에 별다른 대안이 없기도 하지만, 아직도 IT산업이야말로 우리 국민의 기질과 가장 잘 맞는 분야가 아닌가 하는 기대를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경제가 IT산업을 계기로 힘차게 재기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유념해야 하지 않을까싶다.
우선, 벤처기업이 땅에 떨어진 명예를 회복하고 활로를 모색하는 일이 급선무다. 벤처기업은 더 이상 '대박신화'의 주인공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국민들로부터 증오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된다.
특히 벤처기업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닷컴기업은 기업 인수합병(M&A)과 온라인-오프라인 연계, 컨텐츠 유료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살길을 모색해 떳떳하게 재기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정부도 그동안 벤처기업에 군림하는 듯한 관치(官治)의 모습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벤처 육성책을 펼쳐야 할 것이며, 정치권도 벤처를 자금줄로 삼는 나쁜 관행을 타파해야 할 것이다.
거대 통신업체들도 보다 자기 본분에 충실한 한해가 되었으면 한다. 그동안 유무선 통신업체들은 가입자 유치 경쟁에 사활을 걸다시피 하면서 정작 중요한 원천기술 개발에는 소홀했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IMT-2000만 하더라도 사업자로 선정된 SK텔레콤과 한국통신이 모두 비동기식 기술개발에 나서기로 했지만, 이 분야는 국내 기술이 유럽이나 일본보다 많이 뒤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IMT-2000이 천문학적인 로열티를 해외에 유출시켜 국고를 낭비한 CDMA 이동전화서비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손으로 원천기술을 확보해야 하는 노력이 배가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새로 선정된 IMT-2000 사업자나 디지털 위성방송사업자는 가급적이면 내년에 집중적으로 인프라를 구축, 침체된 경기 회복에 일조했으면 한다. IMT-2000 사업은 4조원가량의 직접투자 외에 대략 38조원 정도의 생산유발효과가 기대되며, 위성방송사업도 향후 5년동안 모두 2조4000억원의 직접투자가 이뤄지는 방대한 프로젝트다. 이들 사업이 IT 관련 기업들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뇌관'이란 점에서 관계자들의 각별한 사명감이 요구된다 하겠다.
마지막으로 이제는 IT산업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국민들 사이에 자리매김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IT산업은 바이오산업과 함께 한국이 프론티어 정신을 발휘해 뛰어들 미지의 땅일뿐, 그 자체가 '황금알을 낳은 거위'이거나 '대박'일 수는 없다. 찬찬한 기술개발과 내실 있는 접근이야말로 한국을 알짜배기 'IT 왕국'으로 웅비시킬 수 있는 지름길임을 우리 모두 되새겨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