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4월 우리나라에서는 뜻하지 않던 ‘신(新)경제’ 논란이 벌어진 적이 있다.
정보통신산업의 성장이 10%에 가까운 경제성장률을 이끌면서도 소비자물가는 1%대에 머무르는 ‘고성장 저물가’ 현상이 신경제의 영향 때문이 아니냐는 논란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이같은 논란이 벌어진 것은 바로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신경제 정상회의’를 열어 신경제의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한 것과 상당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불과 7개월여가 지난 지금 미국은 신경제가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감에 휩싸여있다. 올해 초만 해도 ‘벤처 열풍’에 취해 있다가 최근 닷컴기업의 몰락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고조되고 있는 우리 경제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2년간 우리 경제를 들뜨게 했던 ‘신경제 신드롬’을 새해를 맞는 지금 한번쯤 돌아볼 필요가 생긴 것이다.
▽고조되는 신경제 회의론〓아시아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지난 5년간 철옹성 같았던 신경제에 대한 회의가 확산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과거 80년대 고성장을 구가하던 일본기업이 성장세에 힘입어 무리한 팽창을 시도하다가 90년대초 재고물량 증가와 경기후퇴에 빠진 경우를 예로 들면서 미국도 이같은 전철을 밟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를 던졌다.
HSBC증권은 이보다 한술 더 떠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FRB)가 이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내년 상반기에 0.5%포인트 금리를 인하한다 하더라도 미국 경제의 급격한 하락은 불가피하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특히 정크본드에 투자했다가 손실을 입은 은행들이 대출을 줄이고 있고 주가하락에 따라 미국 가계들이 소비를 줄이고 있는 현상을 우려하고 있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득세를 했던 신경제 예찬론자들의 목소리는 최근 들어 점점 찾아보기 어려운 형국이다.
▽‘신경제’가 간과한 것〓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김재철교수는 “신경제론자들은 수요와 공급이라는 경제의 기본원칙을 간과했다”며 “기술발전으로 온갖 새로운 서비스들이 선보이지만 소비자들이 이를 수용하는데는 한계가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단적인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인터넷 전화서비스다. 올해 초 새롬기술의 다이얼패드가 나왔을 때 ‘무료로 국제전화를 사용할 수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에 서버가 하루만에 다운되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몇 개월이 지난 뒤 유사한 서비스들이 우후죽순처럼 선을 보이기 시작했다.
서비스 공급이 늘었지만 소비자들의 수요는 그만큼 증가하지 않았다. 당연히 이들 업체의 수익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경제학의 기본 원칙이다. 이같은 현상은 인터넷 서비스시장이 어느 정도 기술력을 갖고 있는 업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을 정도로 진입장벽이 낮다는 시장 특성 때문에 발생하고 있다.
이는 또 기술 혁명의 성공이 해당 업체들에 쉽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과도 연결된다. 역사적으로 이같은 사례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과거 철도 열풍이 철도업체의 수익으로 연결되지 못했던 것처럼 인터넷 열풍도 닷컴기업의 수익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는 것.
신경제가 또 하나 과신한 것은 ‘기술이 있으면 돈은 무조건 따라온다’는 믿음이었다. 그러나 최근 벤처캐피털과 개인투자자들이 닷컴기업들이 단기간에 수익을 내지 못하자 돈줄을 죄면서 신경제의 동력은 기술이 아니라 투자자금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미국 비즈니스위크지의 편집장인 마이클 만델은 최근 펴낸 ‘도래하는 인터넷 불황’이라는 책자에서 “기술이 신경제의 엔진이라면 금융은 연료인 셈”이라며 “자동차산업 등 구(舊)경제는 예상 밖의 상황이 도래할 때 잠시 브레이크를 밟을 수 있지만 신경제는 비행기와 비슷해 계속 날기 위해서는 새로운 투자자금이 끊임없이 유입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증시 하락→위험 성향이 높은 기업에 대한 투자의 감소→벤처기업의 어려움 가중→기술 혁신 및 생산성 둔화→증시 속락→투자 감소’의 악순환이 되풀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경제의 미래는〓신경제 찬성론자와 올해 내내 신경제 논쟁을 벌여왔던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10월 “신기술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며 신경제의 낙관론과 비관론은 모두 틀렸다”며 “정답은 중간에 있다”고 잠정 결론지었다.
즉 미 경제의 성공은 신기술 때문만이 아니라 안정된 통화재정정책과 규제완화 등에 기인하기도 한다는 것. 그렇다고 신경제의 장점을 완전 부인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인터넷은 기업들에 원자재의 구매부터 아웃소싱에 이르기까지 사업의 전반적인 혁신수단을 제공하면서 생산성을 높이는 것은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이화여대 박용찬 겸임교수는 저서 ‘e비즈니스 파워’를 통해 “전자상거래가 e비즈니스와 개념적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넓은 의미와 폭을 가지고 있다면 전자상거래 자체도 보다 큰 틀에서 종합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실제 마케팅 조사업체인 미국의 마켓가이드는 최근 조사한 닷컴기업 729개사 중 118개사가 손익분기점에 도달하려면 지난 12개월간 창출한 수입의 10배에 달하는 수입증대가 필요한 것으로 분석했다.
경제학계는 오히려 인터넷서비스를 제공하는 닷컴기업보다는 인터넷 장비나 정보통신기기를 생산하는 IT산업과 바이오산업 등이 장기적으로 신경제를 만들어가는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이와 함께 정부의 재정통화정책과 독점정책 등 기존 경제정책의 수단이 정보통신기술 발전과 조화될 때 진정한 신경제의 ‘과실’을 얻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 점차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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