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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줌인]영화자막 '18자의 승부'

입력 | 2000-12-27 19:15:00


외국영화 화면 한쪽에 등장하는 한글자막은 여러 가지 제약요건을 지닌다.

우선 길이의 제한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장면에 따라 가끔 세줄짜리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눈의 피로를 막기 위해 보통 두줄을 넘지 말아야한다. 한줄당 부호와 띄어쓰기를 포함해 원고지 아홉칸의 공간만이 배정된다. 따라서 최대 18자안에서 승부를 내야한다.

한해 평균 40여편의 외화를 번역하는 전문번역가 이미도씨는 “자막번역은 축구경기 중계와 같다”고 말한다. 눈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과감히 생략해버린다는 것이다.

‘미 마이셀프 & 아이린’에서 “네가 눈과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것을 보니 마치 신 레몬을 먹은 사람처럼 보여”라는 대사를 “신 레몬이라도 씹었어”라고 바꾸는 식이다.

외국문화를 한국적 정서에 맞게 고치려는 노력도 만만치 않다. ‘벅스 라이프’에서 “93년 나뭇가지가 떨어지는 참사(Twig of ’93)에도 깔려죽지 않고 살아났는데 왠 호들갑이냐”는 개미들의 대사에 삼풍백화점 사고에 빗대 ‘93년 단풍참사’라는 표현을 쓴 것이 좋은 예다.

하지만 등급심의를 낮추기 위해 ‘구강성교’를 ‘프렌치 키스’라는 엉뚱한 표현으로 바꾸기도 한다. 올해 개봉한 피터 그리너웨이의 ‘8½ 우먼’에서는 반신불수 여자로 등장하는 질리에타의 출신이 ‘한국’에서 ‘일본’으로 둔갑하기도 했다.

영어에 능숙한 관객이라면 쓴웃음 짓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그렇지못한 관객에겐 완전히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는 결과를 낳는다.

욕설을 표현하기 위해 ‘씹쉐’같은 사전에도 없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도 문제지만 한글 맞춤법조차 지키지 않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1년에 300여편의 외화가 수입되지만 전문번역가는 대여섯명에 불과해 인력이 태부족이다보니 생겨난 문제다.

“자막읽기가 싫어 한국영화를 본다”는 신세대 관객이 늘고있는 것은 잘못된 자막과도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