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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어느 증권사 여직원이 고객에게 보낸 편지

입력 | 2000-12-28 18:34:00


동지를 넘긴 지 일주일이 다 돼가는데도 출근하는 새벽녘은 아직 캄캄합니다. 이제 조금씩 밤보다 낮이 길어진다던데 얼마나 더 있어야 출근길에 밝은 해를 볼 수 있을지….

몇달 전부터 제게는 출근길 버스 안에서 기도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오늘은 제발 시세판이 온통 붉게 물들어 고객님들의 환한 미소를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정말이지 올해는 창구에 앉아있는 것이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것 같이 느껴진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시세판 앞에서 고개를 떨군 고객님들의 쓸쓸한 등을 보면 마치 제가 무슨 죄를 지은 것 같았습니다. 어쩌다 고객님들의 실의에 찬 눈빛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가슴이 떨려오고 책상 밑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 되곤 했습니다.

지난 가을 펀드를 환매하러 왔다가 맡긴 돈이 반토막 가까이 난 것을 알고 한참을 따지던 아주머니가 생각납니다. 처음에는 저도 막 대들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털썩 주저앉으며 ‘이제 어떻게 자식 대학공부를 시키겠느냐’며 울먹이시는 모습에 저도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작년에 그 활기차던 객장은 어디로 갔는지…. 갓 스물에 이제 증권사에 들어온 지 17개월에 불과하지만 ‘참 세상일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고 주식이 정말 무섭게 느껴집니다.

사회생활 신참내기지만 올해만큼 힘이 든 적은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집안에서도 직장에서도 막내인 철부지 제가 올 한해를 무사히 넘기는데 큰 힘이 돼 주신 분들이 바로 고객 여러분입니다. ‘우리 애도 아가씨 나이인데 얼마나 고생이 많아’하시며 어깨를 두드려주시던 엄마같은 아주머니, 점심도 거른 채 정신없이 손님을 맞아야 하는 청약 마감일에 ‘이따가 먹어’하며 군고구마를 내밀고 쑥스러워하시던 아빠같은 아저씨,….

새해에는 주가가 오를지 어떨지 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다만 지금 10,000이 넘는 미국의 다우지수도 처음에는 40에서 시작한 것처럼 우리도 욕심내지 않고 기다리다 보면 올해의 손해를 다 만회할 날도 올 거라고 믿습니다.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한 초등학교 4학년 때 병실 침대 곁에서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새옹지마(塞翁之馬) 얘기가 생각납니다.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고 지금의 화(禍)가 나중에 복(福)이 될 수도 있으니 쉽게 절망해서는 안 된다고요.

세상 물정 모르는 제가 이렇게 어른처럼 얘기해서 죄송해요. 저보다 인생의 굽이굽이를 훨씬 많이 겪으셨을 아주머니 아저씨 고객님들. 자, 저 따라 해보세요.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