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해는 유난히도 각종 대란과 위기설이 많았다. 초반부터 벤처위기설이 고개를 들었고 현대그룹 왕자의 난과 대우자동차 부도처리로 주가는 반토막이 났다. 잇따라 금융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제2의 경제위기론이 확산됐으며 연말 은행합병에 대한 파업으로 금융혼란을 겪고 있다.
위기설 대란설이 나올 때마다 국민과 기업들은 불안했다. 3년 전 경제위기가 다시 올까 걱정이었다. 불행히도 경기는 내리막이고 위기설은 가시지 않고 있다. 한 경영자단체가 100대기업 최고경영자에게 물어본 결과 전원이 경제위기가 올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위기는 불가피한 것인가.
그러나 항상 위기론 속에 살면서 잘 버텨내는 나라도 있다. 바로 이웃 일본은 지나칠 정도로 위기설을 잘 만들어 낸다. 조금이라도 악재가 등장하면 각종 위기론 망국론이 판을 친다. 엔고위기론 국채망국론 관료망국론 등이 그런 것들이다. ‘위기가 온다’고 경고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다.
1985년 9월 플라지협정에 따라 엔화가 급격히 절상되자 수출기업이 모두 망할 것이라는 경고가 잇따랐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였다. 일본 제조업체의 경쟁력이 세계 제일이 됐다. 위기론을 전화위복으로 삼은 것이다.
요즘엔 국채망국론이 거론되고 있다. 경기진작을 위해 국채를 발행해 재정지출을 늘리다 보면 국가빚이 눈덩이처럼 늘어나 2003년엔 일본이 파산한다는 얘기다. 이런 논의는 과장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이를 계기로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해결책을 찾는 계기로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엔 미국도 일본을 닮아가는 것 같다. 신경제 붕괴론이 그것이다. 이른바 신경제는 허구일 뿐이며 붕괴된다는 주장이다. 신경제론 붕괴론자들은 호황이 통화완화정책과 아시아통화위기 등 정책 및 외부효과에 의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역시 신경제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는 효과를 내고 있다. 미국경기의 경착륙을 막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예고된 위기는 없다’는 증시격언도 이런 상황을 두고 만들어진 듯하다. 위기설이 나올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면 미리 대책을 마련하기 때문에 위기가 현실화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최근 국내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면 꼭 그렇다고 할 수도 없어 보인다. 이른바 위기설의 ‘약효’가 떨어지고 있는 것 같다. 예전엔 위기설이 나오면 긴장하고 적극 대응책을 모색하던 경제관료들이 달라졌다. 경제위기가 아니라고 우긴다.
무엇보다도 경제현장의 기업인들과 경제관료들이 경제를 보는 눈이 영 딴판이라는 게 문제다. 경제관료들은 ‘경영위기’로 진단하는 반면 기업인들은 ‘경제위기’라고 보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처방도 제각각이다. 한쪽은 ‘기업개혁’을 주장하고 다른 쪽은 ‘경제개혁’을 내세우는 듯하다.
새해에는 위기설이 다시 등장하지 않도록 경제관료나 기업인들이 다같이 분발하라고 부탁하고 싶다. 신문이 너무 지나치게 위기를 경고했다는 비판을 받아도 좋다. 경제위기설이 진짜 위기를 막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다.
박영균parky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