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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포커스]'소리눈'개발 아이넷 21 대표 남혜운씨

입력 | 2000-12-28 19:08:00


‘눈꽃’이라는 TV드라마가 있다. 청초한 눈망울을 지닌 여주인공은 그러나 서서히 빛을 잃어가는 선천성 망막색소변성증(RP)이라는 질병을 앓고 있다. 언제 완전한 어둠에 휩싸일지 모르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도 애써 피하는 중이다….

“‘눈꽃’보시나요? 제 병이 주인공과 같은 병이에요.”

기자가 서울 신대방역 부근의 컴퓨터프로그램 개발업체 (주)아이넷21을 찾아갔을 때 대표이자 사단법인 정보장애해소연구원장인 남혜운(南惠云·36)씨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시각장애인인 걸 잊었을 게다. 투명한 안경을 낀 그의 눈동자엔 동천(冬天)의 구름이 맑게 비치고 있었다.

▼신지식인 대통령상 수상▼

22일 그는 장애의 역경을 딛고 시각장애인용 컴퓨터프로그램을 개발한 공로로 제2건국위원회로부터 신지식인 대통령상을 받았다. ‘소리눈 2000’‘굿 아이’라는 음성인식 합성프로그램은 컴퓨터화면 위의 정보를 읽어주는, 말 그대로 시각장애인의 소리눈 역할을 한다.

그가 격세유전질환인 RP의 증세를 안 것은 사법고시 1차시험에 붙은 86년(서울대법대 2학년 재학중). 자꾸 눈이 안보인다던 누나의 검진을 받기 위해 서울대병원 안과에 가서였다. 실명선고는 누이가 받았지만 사실은 그도 같은 증세를 갖고 있었다. 어제 보이던 것이 오늘 안보인다니…. 차라리 한순간에 맹인이 되었다면 나았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면 그 상태에서 앞으로의 계획이라고 세울 수 있었을 테니까.

“내가 장애인이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팔방미인이라는 소릴 듣고 자랐는데 왜 이런 아픔이 오는지 알수가 없었어요.” 해답을 찾았느냐고 물어보았다. “아직도 풀리지 않는 문제예요. 고통이라는 건 끝이 없다는 게 정확한 표현인데…. 그냥 나한테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내 자신이 헤쳐나가야지요.”

법관의 꿈을 접고 대학졸업 후 500만원을 밑천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도자기공장, 향수제조업, 정치광고사업, 입시학원 등으로 돈을 꽤 벌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원하던 삶은 이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종주먹을 대듯 꾸역꾸역 치밀어 올랐다. 시력은 가까이 있는 사람의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나빠졌다. 실수할까봐 사람만나는 것이 두려워졌다.

“96년이죠. 그때가 최악의 상태였어요. 안보이니까 마지막 남은 보루가 컴퓨터더라고요. 신문이며 정보를 접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확대프로그램으로 모니터를 보면서 1년을 살았죠. 4배까지는 확대해서 보겠는데 8배 확대는 불가능해요. 화면에 한 글자만 덩그렇게 뜨니까.”

길은 스스로 열리지 않는다. 뜻이 있어야만 길이 보이는 법. 피아노학원을 하는 누나가 주변에 시각장애인에게 컴퓨터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다며 김정씨를 소개해 준 것이 바로 그 무렵. 김씨로부터 장애인을 위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알게 된 그는 그 순간을 ‘다시 빛을 보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법관의 꿈 접고 사업시작▼

‘가라사대’‘소리눈 98’을 접하면서 이렇게 좋은 걸 왜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을까, 좀더 잘 만들 수 없을까를 궁리하게 됐다. 우리나라에 시각장애인이 30만∼40만명(등록인구는 7만명)이나 된다는 사실도 그때서야 알았다. 비로소 자신이 장애인에 속하고 있음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일단 시각장애임을 밝히고 자신을 바꾸자고 작정하자 세상이 편해졌다. “시력을 잃고나서 얻은 것도 있어요. 우선 기억력이 비상해지고요. 또 하나는 사람을 통째로 보게 돼요. 단점 따로, 장점 따로가 아니라 사람 자체를요. 한사람 한사람 인간관계가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어요.”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지난해 3월 회사를 차렸고 올 7월엔 장애인들의 정보격차 문제를 풀기 위한 사단법인도 만들었다. 멤버 15명 중 11명이 저시력자였다.

“운명 비슷한 게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10년전 쯤에 점을 본 적이 있거든요. 관운이 있고 소리나는 일을 해야된다고 했어요. 또 밝히라는 말도 했는데 그때는 ‘아, 내가 역시 법관이 되는구나. 소리나는 일을 하라니 방송광고를 하라는 말인가’ 했지요. 지금 보니 이런 신지식인상을 탄다는 얘기였나 싶어요. 소리나는 일은 ‘소리눈’을 말하는 거고.”

사람의 힘으로 운명을 바꿀 수는 없더라도 운명을 ‘밝히고’ 움직여 나가는 방법은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자신이 해야할 일은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자신을 바꾸는 것이었다. 오만을 깨고 자신에게 솔직해지기, 안보이는 것은 안보인다고 드러내기, 창피해 하지 않기….

▼운명은 스스로 만드는 것▼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힘이 된 이는 다섯살 연상의 아내였다. 10년 전 컴컴한 레스토랑에서 소개팅으로 만난 아내에게는 두세번 데이트 후 사실을 밝혔다. “현재는 잘 보니까, 또 RP라는게 진행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하며 아내는 상관없다고 했다. “가장 고마운 건 날 믿어준다는 거죠.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싶을 때도 날 믿어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잘할 수 있는 거고. 아내는 ‘당신이 어찌되더라도 내가 책임져줄게’하거든요.”

그가 좋아하는 말이 ‘케세라세라’다. 10년전 책에서 읽었는데 그게 될 대로 되라는 체념이 아니라 ‘될 것은 되고야 만다’는 뜻이란다. 그런데 경험으로 보니까 그냥 두면 안되더라고 했다. 노력을 하고 실천을 하면, 되는 건 되고야 말았다. ‘케세라세라’. 얼마나 희망적인 말인지!

“다시 보게 된다면 무엇을 가장 보고 싶으냐”는 물음에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해맑게 대답했다. “운전을 하고 싶어요. 가고 싶은 데를 자기 마음대로 갈 수 있다는 것도 축복이죠.” 그리고 미안하다는 듯 덧붙였다. “지체장애인들한테는 죄송한 말인가? 나는 이렇게 걸을 수도 있는데….”

만난사람=김순덕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