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의 신화는 오늘도 살아 있다.
미국 새너제이에 자리잡은 시스코 시스템스. 14만평의 넓은 회사 부지 위에 잔잔히 불어오는 훈풍을 맞으면 겨울을 잊는다. 곳곳에 세워진 건물이 35개 동. 굉음이 들린다. 24개 동 건물을 새로 짓느라 굴삭기가 요란하게 돌아가는 소리다. 어느 건물에 들어가도 임직원들의 활기찬 움직임에서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이 회사는 매출액이 매년 30∼60%나 늘고 있다. 2000회계년도(99년8월∼올해 7월) 순매출액은 189억달러. 전년보다 55%나 증가했다.
시스코 시스템스의 분위기는 실리콘밸리의 여느 업체들과는 다르다. 요즘 실리콘밸리는 어떤가.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 하루 종일 계속되는 교통체증. 그리고 심연으로 잠수하는 나스닥…. 우울함과 허탈함으로 가득하다. ‘첨단기술의 메카, 벤처의 산실’이라는 간판을 내려야할지 모른다는 불안한 이야기도 오간다. 실리콘밸리의 기업인들도 닷컴은 이제 ‘닷곤(dot gone)’이라며 자조하고 있다.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는 시스코 시스템스의 비결은 무엇인가. 이 회사는 어떤 ‘글로벌 경영 버전 2001’을 갖고 있는가.
▽수혈과 교배〓최고경영자(CEO)인 존 체임버스 사장과 ‘M&A별동대’가 자리잡고 있는 헤드 오피스. 이곳 1층엔 주요 고객을 위한 브리핑센터가 있다. 이 브리핑센터 초입에는 12개의 캐비닛에 들어 있는 네트워크 장비가 서있다.
기술마케팅 엔지니어 쿠르트 쉬미트는 시스코 장비의 우수성에 대해 신념을 갖고 설명했다. ‘가장 중요한 장비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1번 장비”라고 대답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그의 설명. “그거요. 우리가 인수한 기업이 만든 제품인데 색깔만 다시 칠했어요.” 그는 “연구개발(R&D)의 70%정도는 자체적으로 하고 나머지는 인수합병을 통해 한다”고 덧붙였다.
시스코의 왕성한 인수합병(M&A)은 성장에너지의 원동력이었다. 시스코는 몸집 부풀리기나 금융이득을 위해 M&A를 하지 않는다. 인재와 기술획득이 목적이다. 93년 첫 M&A를 시작한 뒤 지금까지 70개 기업을 흡수했다.
다른 건물에서 만난 한 엔지니어는 “자체 R&D도 상당부분은 일찍 인수한 기업의 엔지니어들이 이뤄낸 것”이라고 말했다.
하이테크 선두기업들이 자기 기술만 고집하다가 시장에서 쓴 맛을 본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기술을 아웃소싱하는 것이 시스코의 일관된 전략이었다.
이는 체임버스 사장의 말에서도 잘 나타난다.
“고객의 기대는 급변합니다. 기업은 자체 R&D를 통해서든, 인수를 통해서든 여기에 대응할 준비가 돼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약 6∼12개월 뒤 각광을 받을 훌륭한 기술제품을 가진 작은 벤처기업을 인수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엔지니어와 차세대제품을 사는 것입니다.” “중요한 기술부문에서 우리가 5위 안에 들지 않는 상황이 생긴다면 5위 안에 드는 한 기업을 사거나 제휴를 맺습니다.”
▽고객이 원한다면〓시스코 성장신화는 고객 제일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때문에 시스코는 기술신봉주의를 철저히 배격한다. 대신 모든 가치의 중심에 ‘고객’을 둔다. 고객이 원하지 않는 기술은 아무리 첨단이라고 해도 의미가 없으며 고객이 원하는 기술은 어떻게 해서든 공급한다는 것.
93년 시스코의 첫 M&A도 그렇게 시작됐다. 라우터만을 생산하던 시스코는 고객기업이던 보잉사로부터 스위치 제조업체를 인수하라는 충고를 받고 크레센도를 9500만달러에 사들였다. 시스코가 고객의 권유에 따라 사들인 기업은 이뿐 아니다. 99년에는 레벨3커뮤니케이션스의 충고를 듣고 트랜스미디어커뮤니케이션을 4억700만달러에 사들였다. 시스코는 또 고객의 수요를 따라잡기 위해 필요한 M&A라면 엄청난 출혈도 기꺼이 감수했다. 예컨대 시스코는 99년 8월 직원이 400명에 불과했고 단 한번도 순이익을 낸 적이 없는 광네트워킹업체 시렌트를 무려 75억달러라는 거액에 사들였다.
▽미래와 사람, 그리고 문화〓시스코는 항상 미래에 대비했다. M&A에서 거의 실패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크레센도 인수가 대표적이다. 스위치시장이 아직 익지 않은 당시에는 이 인수가 실패할 것이라는 예측이 절대다수였다. 그러나 오늘날 스위치는 연간매출액이 수십억달러에 이르는 시스코의 주력상품이 됐다. 크레센도 인수가 없었다면 오늘의 시스코도 없었을 것.
사업개발 담당 아마르 하나파이 부사장은 ‘화학적 결합’을 강조했다.
“우리는 피인수기업을 선정할 때 문화가 시스코와 일치하는지 여부에 역점을 둡니다. 대기업이나 역사가 오래된 기업은 ‘조직거부반응’이 나타나기 쉽습니다.”
이런 이유로 시스코가 인수한 기업의 대부분은 직원이 100명 안팎인 설립초기의 벤처. 벤처기업에서 끊임없이 새 피를 받으므로 시스코는 규모가 아무리 커져도 대기업이 아니라 벤처기업과 같은 문화를 유지한다는 것. 시스코 직원들은 자기 회사가 ‘세계 최대의 벤처기업’이라고 말하기를 즐긴다.
인재를 최고의 ‘자산’으로 생각한다. 인수한 기업의 임직원을 붙잡아 두는데 최선을 다한다. 인수할 때 스톡옵션을 듬뿍 주는 것은 물론 시스코에 합류한 뒤에도 매년 스톡옵션을 추가로 준다. 이 때문에 시스코에 합류한 기업의 CEO는 대체로 한 사업부문의 리더로 계속 일한다. 피인수기업 직원들의 이직률은 6∼7%로 다른 IT기업의 평균 이직률의 절반에도 못미친다. 역동적으로 스스로를 바꾸고 외연을 넓히고 있는 시스코 시스템즈. 기업도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사실을 이곳에서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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