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한국의 대통령 선거전이 한창인 때였다. 복제양 ‘돌리’의 탄생으로 전 세계가 유전자 조작과 생명, 인간의 존엄성 문제를 놓고 논란에 휩싸이자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은 직접 TV에 출연, 기자회견을 했다.
그 즈음 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이른바 ‘3금법(三禁法)’을 제정하겠다고 호소했다. 정치보복 지역차별 친인척기용 등 세가지를 금하겠다는 것이었다.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후보는 ‘DJ비자금’ 수사를 집요하게 촉구하고 있었다.
당시 국민회의의 한 당직자는 이렇게 되뇌었다. “우리는 언제나 정치지도자가 인간의 존엄성 같은 문제를 놓고 대국민 기자회견을 하는 날을 볼 수 있을까.”
그러나 2001년의 상황도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다. 작년 ‘4·13’총선에서도 나타났듯이 우리 정치의 지역구도는 점점 더 ‘야만의 얼굴’을 닮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올해는 어느 때보다 ‘뉴 리더십’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질 전망이다.
우선 ‘3김 정치’의 끝이 보이고 있다. 또한 기성세대와는 판이한 사고와 행동양식을 가진 젊은 세대들의 부상, 비정부기구(NGO)의 대거 약진, 남북관계의 근본적 변화 가능성, 전세계적 정보네트워크 등 지역패권주의적 리더십이나 ‘골목정치형 카리스마’로는 헤쳐나갈 수 없는 도전들이 이미 현실화돼 있기 때문이다.
▽카리스마형에서 조정자형으로〓고려대 함성득(咸成得)교수는 “이제는 ‘나를 따르라’고 외치는 카리스마적 명령이 아니라 전문성과 조정력, 타협과 설득의 능력이 필요한 시대”라고 말했다. 그는 이를 ‘관리형 리더십(Managerial Leadership)’이라고 규정했다.
의약분업사태 등 최근의 각종 집단적 갈등은 카리스마형 리더십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준 것들이라는 지적이 많다. 함교수는 “김대중대통령의 리더십은 카리스마적인데, 시대상황은 그것을 원치 않고 있어 국정운영의 한계상황들이 빚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세중(李世中)전 대한변협회장은 “파당적 정치를 하는 한 국민통합과 사회통합은 요원하다”며 ‘탕평(蕩平)의 리더십’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스형 리더십에서 시스템형 리더십으로〓김영삼(金泳三)정부의 개혁청사진을 입안했던 전병민(田炳旼)씨는 김영삼 전대통령에게 “보스는 사람을 움직이고, 지도자는 시스템을 움직인다”고 조언했었다. 그러나 YS는 재임 시절 공조직보다는 비선(秘線)조직에 의존하는 등 보스형 리더십에 기울었다는 비판이 많았다.
동아일보가 실시한 ‘2001년 국민의식조사’에서 ‘측근중심 지역편중 인사’(33.6%)와 ‘독단적 국정운영’(18.9%)이 김대중대통령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힌 사실은 김대통령의 리더십 역시 국민에게 보스형으로 비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직업공무원들을 대통령의 임기와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국정운영에 총력 동원하기 위해서는 타협과 설득을 통해 국회에서 정책을 입법화하는 정책적 리더십과 입법적 리더십이 필수적이라는 지적도 많다.
▽네거티브(Negative) 리더십에서 포지티브(Positive) 리더십으로〓이회창총재에 대해 일부에서 ‘네거티브 리더십’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라이벌의 실수에 따른 반사이익을 노리거나, 또는 상대를 깎아내리는 것으로 자신의 리더십 부족을 메우려 한다는 의미다.
경실련의 이석연(李石淵)사무총장은 “정치지도자의 리더십은 ‘내 탓이요’에서 출발해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난국 수습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영삼정부에서 대통령교육문화수석을 지낸 김정남(金正南)씨는 ‘내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랴. 오늘 하지 않으면 언제 하랴. 여기서 하지 않으면 어디서 하랴’라는 포지티브 리더십만이 국민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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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의 유형▼
지도자의 리더십에 따라 국가적 위기가 극복되기도 하고 되레 악화되기도 한다. 리더십에 따른 위기대처 성패 사례를 살펴본다.
▽도덕적 리더십〓85%의 높은 지지율을 보이며 박수속에 퇴임할 수 있었던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대통령이 대표적 사례. 만델라는 흑인들을 위한 인권투쟁에서 얻은 국민의 존경심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
이화여대 조기숙(趙己淑·정치학)교수는 “만델라는 도덕성을 일관되게 보여줌으로써 분열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단합시켰다”고 평가했다.
▽정서적 리더십〓정서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국민을 움직이는 리더십.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대통령이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람보대통령’으로 불린 레이건대통령은 분쟁지역에 군대를 보내 ‘미국의 적’들을 때려부수는 ‘상징조작’을 통해 월남전 패배와 경제위기로 침체돼 있던 국민에게 활력을 되찾아 주었다.
▽관리적 리더십〓큰 틀의 관리만 하고 나머지는 시장 등의 자율기능에 맡겨두는 유형. 대표적 사례로는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을 들 수 있다. 클린턴은 일일이 챙기기 보다는 ‘무엇을 지원해줘야 할지를 아는’ 대통령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숭실대 오철호(吳徹虎·행정학)교수는 “60년대 존슨과 70년대 닉슨이 모든 것을 다 직접 하려 드는 ‘황제적 대통령’이었다면, 클린턴은 민간과 국가의 시스템을 믿는 관리적 대통령이었다”고 말했다.
▽인기영합적 리더십〓아르헨티나의 카를로스 메넴, 페루의 알베르토 후지모리, 브라질의 페르난두 콜로르 전 대통령 등이 이 유형에 속한다.
이들은 대체로 △과감한 개혁을 통한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 추구 △기존 국가기관 경시 △정당과 이익집단의 요구 무시 △정치인과 공무원 적대시 △대통령에게 권한 집중 등의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국민의 신뢰를 상실하고 실패했다. 국민에게 고통분담을 요구했던 마거릿 대처 전 영국총리와는 정반대였다. 미 조지워싱턴대 김정렬(金楨烈)객원연구원은 “한국의 경제위기와 대북정책의 교착현상도 대국민 신뢰상실이 주요인이라는 분석이 있다”고 자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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