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1659호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톤으로 세계를 제패했던 ‘민족의 영웅’ 손기정(89)옹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소변줄과 링거줄이 귀찮다며 뽑아내려 하는 아버지 손 옹을 말리는 딸 문영(59)씨의 두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당당한 풍체로 세상을 호령하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병상에서 통증을 호소하는 아버지가 너무 안쓰러운 모습이다. 하지만 정신이 맑지 않은 손 옹은 마음이 아주 ‘편안한 듯’ 보였다.
손 옹은 지난해 10월 중순 오른쪽 엄지와 검지 발가락 사이에 생긴 상처가 악화되면서 썩어들어가 치료차 일본 가와사키에 가 10년째 주치의를 자청하고있는 하야카와 박사가 있는 가와사키시립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왔으며 민단 요코하마지부 사무부장으로 있는 아들 정인(57)씨가 병상을 지켰다. 그러나 손옹은 두달여 만에 “조국에서 치료받고 싶다”고 고집하며 지난해 말 귀국, 이 병원에 입원했다.
당초 썩어들어가는 오른쪽 엄지와 검지 발가락은 고국에 돌아온 뒤 다소 호전돼 ‘영웅의 발가락’은 일단 절단 위기를 넘겼다.
삼성서울병원 혈관외과 김동익 과장은 3일 “닷새전 처음 봤을땐 절단해야할 상황이라 걱정했는데 며칠 사이 상태가 좋아져 수술을 하지 않기로 했다. 비관적인 상태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손 옹은 이번 주말쯤 퇴원, 통원치료에 들어간다.
딸 문영씨는 “아버지가 한국으로 돌아온 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병원인데도 낯익은 가족들이 들락거리니까 집으로 착각할 정도로 좋아하신다”고 말했다.
병상에 누운 손 옹은 당당한 모습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정신이 맑을 땐 ‘옛 모습’이 완연했다. “당신 누구야” “어 그래. 반가워” 등 찾아오는 사람을 가리키며 농담을 던지는 등 원래의 모습을 보였다.
“국민들이 매우 걱정하고 있다”고 말하자 손 옹은 “이렇게 살다 죽는거지 뭐”하며 웃어넘기기도 했다.
손 옹은 현재 뇌졸중과 심장병, 복부대동맥류, 전립선비대증 등 복합적인 노인성 질환이 겹쳐 있어 기력이 많이 떨어져 있다. 병원측에선 만일의 경우 수술을 대비해 각종 검사를 하자고 권유하지만 가족들은 막대한 치료비 때문에 우선은 발가락 치료만 하고 있는 상황. 다행히 이번 치료비는 삼성문화재단에서 전액 지불키로 해 한숨 덜었지만 고령인데다 재발 가능성이 커 노심초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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