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 금융기관이어서 공적자금을 지원받은 A투신사의 H사장. 지난해에 '해결사'로 외부에서 스카우트됐다. 그는 금융계 지인들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었다. "지금 사는 아파트는 다른 사람 명의로 해 놨겠지?" "명의이전 안 했으면 빨리 해두는 게 좋을 걸…."
축하인사 대신 들은 이 말 뜻을 그때는 몰랐다. 하지만 공적자금 들어간 책임을 물어 국정감사장에 이리저리 불려다니고 다음주 열리는 국정조사 자료를 준비하면서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금융 CEO들, '책임지는 일은 안 한다' =금융권 임원들이 극도의 불안감에 떨고 있다. 특히 국민세금인 공적자금을 받은 금융회사 간부들은 혹 '부실경영인'으로 낙인 찍힐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예금보험공사법에 따르면 회사 임원들이 '선량한 관리자 의무'를 제대로 못하면 옷을 벗는 것은 물론 민형사상 책임까지 져야 한다. 예보는 은행 종금 투신 금고 등 회사에 부실을 입혀 공적자금을 들어가게 한 2218명의 임직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하거나 재산을 가압류한 상태.
문제는 책임에 대해 명확한 선을 긋기가 어렵다는 것. B은행장은 "임원들이 서로 책임을 안 지려고 발뺌하고 조금이라도 책임을 물을 것 같은 일은 아예 맡으려 하지 않는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C투신 사장은 "주식이나 채권을 사고 파는 펀드매니저들에게 운용방향을 설명해도 영(令)이 안 먹힌다"고 말했다. 예금보험공사 조사가 본격 진행된 지난해 대부분 금융권 인사들은 아파트나 땅 예금등 자기재산을 부인이나 친척 명의로 돌려놓았다는 것이다.
▽손해배상은 물론 검찰고발까지=금융감독위원회는 한국투신과 대한투신에 공적자금 8조여원을 넣으면서 전직 사장과 임원진 대부분 명단을 검찰에 넘기고 재산압류를 했다. 후임 사장들은 전임 임원들 재산을 조사하고 압류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정부의 주식매수 지시를 거부하지 못했고 부실 투신사 신탁재산 명령에 항의하지 않은데다 대우채권을 너무 많이 펀드에 넣은 게 잘못이라는 것. 관료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가 '당신이 경영을 잘못했다'는 이유로 재산까지 날리게 된 처지다.
▽주식 채권 운용 '몸사리기' 대출도 '나몰라라'=이런 '무작정' 책임묻기 때문에 시중자금난이 가중되고 있다. 은행대출 담당자들은 "나중에 부실기업이 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회사에 어떻게 돈을 빌려주나"며 대출창구를 걸어잠구었다. 정부가 아무리 자금대책을 내놓아도 금융권 현장에서 처벌이 두려워 몸을 사리는 한 효과를 거두기 어려운 게 금융권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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