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는 4일 회동을 포함, 여야 총재 자격으로 모두 일곱 번 회담을 가졌으나 결과는 매번 신통치 않았다. 왜 그럴까.
정치권의 대다수 인사들은 5일 두 사람의 상호 불신을 불화(不和)의 핵심 원인으로 꼽았다. 서로에 대한 신뢰를 잃은 상태여서 상대가 아무리 약속과 다짐을 해도 이를 믿지 않고, 그러다 보니 회담에서의 합의가 깨지는 악순환이 거듭된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일곱 차례의 회담 중 두 사람은 여섯 번 그럴 듯한 합의 사항을 발표했는데도 곧이어 불거진 돌발 악재(惡材)로 인해 관계가 악화됐다.
98년 11월 회담에선 경제청문회와 정치 관계 법 개정에 합의했다가 얼마 후 국회 내 국가정보원 사무실(529호)이 문제가 됐다. 99년 3월에는 인위적 정계 개편 중단 및 여야 경제협의체 구성 등에 의견을 같이 했으나 회담에서 이총재가 한 발언이 일부 새어 나와 합의문이 없던 게 됐다.
작년 한해 동안에만 해도 4차례에 걸쳐 ‘상생(相生)의 정치’, ‘여야 초당적 협력’ 운운하는 화려한 합의문을 발표했지만 총선사범 기소 등이 터져 여야 모두 ‘그럴 줄 알았다’며 어렵게 조성된 화해 분위기를 접었다.
한나라당 손학규(孫鶴圭)의원은 이를 ‘대권을 놓고 벌이는 제로섬게임의 폐해’라고 설명했다. 김대통령이나 이총재 모두 근본 목적이 대권 쟁취 또는 정권 재창출이어서 서로를 제압하지 않으면 자신이 패배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진정한 의미의 협상이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주장이었다.
김대중대통령과 한나라당 이회창총재 회담 일지
일자
현안
회담 이후
1998.11.10
사정정국, 경제청문회
국회529호(국회내 국정원 사무실)사건으로 여야 대치
1999. 3.17
야당 장외투쟁
이총재의 내각제관련 발언 공개로 파문
2000. 4.24
16대총선후 정국운영
한나라당 전당대회로 대화 단절
2000. 6.17
남북정상회담 설명
정상회담 내용 유출 파문으로 갈등
2000. 6.24
의약분업
선거부정 공방으로 국회 파행
2000.10. 9
공적자금 및 대북정책
검찰 탄핵소추 공방으로 여야 대치
2001. 1. 4
신년 정국 운영
‘의원 꿔주기’ 등에 대한 시각차로 갈등 심화
반면 고려대 함성득(咸成得)교수는 “두 사람이 한결 같이 논리를 중시하는 성향이어서 근본적으로 양보와 타협이 힘들고 따라서 회담을 해도 절충안이 나올 여지가 없다”고 분석했다. 그는 “두 사람이 만나면 평화가 없다”고 단언했다.
이러다 보니 영수회담 후 정국은 냉각되기 일쑤이고, 그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민국당 한승수(韓昇洙)의원은 “다른 때도 아니고 연초에 여야 영수가 만났으면 서로 공감하는 대목을 찾아야 하는데 그렇게 싸우기만 하니 국민이 불안해서 살 수가 있느냐”고 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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