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에어라인은 국제 항공업계에서 서비스의 대명사로 여겨진다. 인구 고작 300만명의 나라에서 태어나 세계적 항공사로 발돋움하게 된 비결이 서비스에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서울 광화문의 한 일식집이 종업원들에게 서비스를 강조하기 위해 이 항공사의 승무원 유니폼을 입혔더니 손님이 늘었다는 에피소드까지 있을 정도다.
싱가포르 항공사가 처음부터 그렇게 서비스가 훌륭한 회사는 아니었다. 정부의 보호 아래 독점적 위치에서 장사를 하던 초창기에는 서비스 자체가 필요없었고 따라서 그렇고 그런 국적 항공사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나라 정부가 항공자유화를 선언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싱가포르에어는 외국 항공사들과 동등한 조건 아래 경쟁할 때 살아남기 어렵다며 정부에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이 때 정부는 “국민의 이익을 위해서는 항공사 하나쯤 문닫아도 좋다”며 개방입장을 고집했다. 그 후 수많은 외국항공사가 분주하게 날아들게 된 이 나라는 국제 상거래의 중심지가 되어 오늘날의 번영을 일궈냈다. 이 과정에서 싱가포르에어는 생존을 위해 서비스를 혁신적으로 향상시켰고 그 결과 독점시대에는 꿈도 못꾸던 세계 굴지의 항공사로 성장했다. 개방이 내국업체에 당장은 고통스럽지만 길게 보면 산업발전의 소중한 밑거름 역할을 한다는 산 교훈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외환위기 이후 우리의 시장개방도 급속하게 진전됐다. 문제는 외형적으로는 개방을 해 놓고 정부가 여전히 구시대적 잣대로 외국자본을 다루려 한다는 점이다.
제일은행과 금융감독원간의 불화가 대표적인 사례다. 올해 만기가 돌아오는 수십조원어치의 회사채를 산업은행이 인수하고 그 중 일부를 시중은행들이 재인수토록 한 정부의 방침을 제일은행이 거부한 데서 문제가 촉발됐다. 만기가 된 회사채의 처리는 해당 회사와 금융기관이 능력껏 알아서 할 일이지 정부가 나서서 은행에 인수토록 한 것은 기업의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를 낳는 대단히 잘못된 판단이며 구조조정에 역행하는 정책이다. 그걸 외국자본인 제일은행이 받아들일 리 없다.
거기다 대놓고 금감원이 “두고 봐라. 자사 이기주의에 강력히 대응하겠다”고 협박하고 나선 것은 아무래도 큰일을 낼 조짐이 보인다. 이 은행에 가해지는 정부의 압력은 하나에서 열까지 그대로 미국정부와 투자가들에게 전파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국제적 관행에 어긋난 관치의 증거가 차곡차곡 쌓여만 가고 그로 인해 우리나라의 국제적 신인도가 떨어질 때 그 결과는 또다시 국민이 받아야 할 고통으로 나타날 뿐이다.
이 은행을 해외에 매각할 때의 조건이 유리했느냐 불리했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얘기다. 일단 정부와의 계약으로 외국자본이 제일은행을 인수한 이상 그들에게 영업의 자유를 부여하는 것은 당연한 명제다. 그들이 관치에 굴복하지 않고 철저하게 고객과 주주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경영하는 기법과 자세를 우리가 배우자고 했던 게 아닌가. 그래놓고 지금 와서 정부가 은행을 협박하는 모습은 참으로 연민의 정마저 느끼게 한다. 어쩌면 고객은 그렇게 해서 정부로부터 독립성을 지키려는 제일은행을 더 신뢰하고 더 많은 예금을 넣을지도 모른다. 더 튼튼한 은행이 될 싹이 보이기 때문이다.
환란이 부실기업에 대한 대출로 인해 은행의 기능상실에서 비롯됐고 부당대출의 과정에 권력의 개입이 있었다는 것은 만천하에 공개된 사실이다. 그래서 정부는 외환위기 이후 수도 없이 경쟁력없는 기업과 금융기관을 가차없이 퇴출시키겠다고 국민 앞에 약속해왔지만 환란 3년 만에 보는 정부의 모습은 옛날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이런 정부에 구조조정을 맡기고 있는 국민이 불쌍하기만 하다.
진정으로 외환위기를 극복하려면 국제화 개방화를 촉진해서 한국을 사람과 돈이 모이는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그 기준에 맞지 않는 관행과 규범과 법률을 모두 뜯어고치는 것이 선결과제다. 환란 직후 사회가 긴장해 있을 때 했더라면 좋았을 일이지만 앞으로 살아남기 위해 지금이라도 실천에 나서야 한다. 정부는 기업 몇 개를 잃는 한이 있더라도 4700만 국민을 위해서라면 개발경제시대의 악습을 하루 빨리 집어던질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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