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장소인 경기도 의왕의 라이브 카페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지하철 4호선 인덕원역에 내려 잡아탄 택시운전사에게 카페 이름을 대자 곧 “아, 드라마 ‘왕건’에 나오는 애꾸눈 궁예가 운영한다는 그 카페요?” 라고 말했다.
꽁꽁 얼어 아이들의 스케이트장이 된 백운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카페 2층에서 탤런트 김영철(48)을 만났다.
얼굴이 조금 말라보인다고 했더니 그는 요즘 ‘최후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궁예가 서서히 미쳐가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완전히 미쳐 날뛸 때는 아무래도 살이 좀 빠진 초췌한 모습이어야 할 것 같아 몸무게를 한 5㎏쯤 뺐습니다. 살 빼려고 식사량과 잠을 줄였더니 요즘은 늘 피곤해요. 궁예가 죽을 무렵에는 여기서 5㎏쯤 더 빼려고 합니다.”
‘궁예’로 살면서 그는 이틀에 한번씩 머리를 밀었다. 한쪽 눈만 사용하다보니 시력도 나빠져 안대로 가린 왼쪽 눈은 0.8에서 0.2로, 오른쪽 눈도 1.2에서 0.8로 떨어졌다. 이런저런 고생이 많았지만 궁예 덕분에 그는 요즘 28년 연기생활 중 가장 빛나는 순간을 맞고 있다.
지난 연말 그는 KBS 연기대상을 탔고 영화 출연 제의도 받았다. CF 제의, 인터뷰 요청도 쏟아지고 올 가을에는 좀 더 나은 ‘조건’으로 다른 방송사의 현대극에 출연할 예정이다.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서글픈 생각도 듭디다. 인기 있을 때는 밀물처럼 몰려들고 인기가 조금 식으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이 어쩐지 경박하다는 생각도 들고…. 언론도 ‘잘 나가는’ 사람에게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지 말고 묵묵히 연기를 하는 숨은 ‘진주’를 캐내 다듬어 주면 좋겠습니다.”
‘태조 왕건’은 제목이 무색할 만큼 ‘왕건’보다 ‘궁예’의 인기가 높다. 총 156회로 끝나게 될 이 드라마에서 궁예는 110회까지 나온다. KBS 인터넷 시청자 게시판에도 궁예에 대한 얘기로 가득하다.
‘궁예’의 무엇이 이처럼 시청자를 사로잡는 것일까.
그는 “정치에 대한 실망 등 요즘 우리 사회 분위기가 궁예의 강력한 지도력과 카리스마에 쏠리도록 하는 것 같다”며 당대의 영웅 궁예와 이를 잘 그려낸 이환경 작가에게 공을 돌렸다. 하지만 역사책과 대본속의 인물을 살아있는 캐릭터로 표현해 낸 공은 전적으로 배우인 그의 차지다.
배우는 눈빛으로 연기한다. 그런데 한쪽 눈을 가려놨으니 그는 팔 하나를 묶어놓고 경기를 치르는 권투 선수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그는 한쪽 눈만으로 미륵의 자애로움, 군주의 카리스마, 그리고 폭군의 광기까지 자유자재로 뿜어내고 있다.
요즘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관심법(觀心法)’도 상대방의 마음을 꿰뚫어 볼듯한 그의 눈빛 때문에 더욱 그럴싸해 보인다.
“연기는 무엇보다 마음을 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은 연기는 가볍고, 기억에서 쉽게 잊혀지지요. 저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늘 영웅인 ‘궁예’라는 이름을 욕되지 않게 연기할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다짐하곤 합니다.”
인터뷰 도중 “어머, 궁예다” “‘높으신 분’을 만나게 돼 영광”이라며 팬들이 사인과 악수를 청해왔다. 일곱번이나 찾아온 끝에 겨우 만났다고 반가와하는 30대 여성부터 충북 제천에서 올라왔다는 중년 부부까지 팬 연령층이 다양했다. 이들이 내미는 종이에 그는 ‘김영철’ 대신 ‘궁예’라고 사인했다.
궁예 덕분에 카페 장사가 잘되겠다고 하자 그는 “요즘은 경기가 정말 안좋은 것이 느껴진다”며 “매상이 한 40%쯤 줄었다”고 했다. 바쁜 탓에 그는 가끔씩 들르지만 탤런트 출신인 부인(이문희)은 매일 나와있다.
뱀띠(53년생)인 그가 신사년(辛巳年)에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띠로 봐서는 올해도 잘 풀릴 것 같은데.(웃음) 나 하나 잘되면 뭐합니까. 주위 사람들이 다 같이 잘돼야지요. 무엇보다 경제가 잘 풀려서 이 땅의 아버지들이 어깨 좀 펴고 살 수 있었으면 합니다.”
▼역사엔 '비참한 최후'…극에선 '영웅적 죽음' 준비
TV프로그램 인기 순위에서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는 ‘태조 왕건’.
인기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는 궁예는 언제, 어떻게 최후를 맞게 될까.
당초 제작진의 계획은 총 156회 드라마 분량 중 80회쯤에서 궁예가 최후를 맞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궁예가 강렬한 카리스마로 인기를 끌자 ‘최후의 날’은 100회로, 얼마전에는 다시 110회로 계속 미뤄졌다. 심지어 “그냥 130회까지 계속 가는게 어떠냐”는 얘기마저 나오고 있다. 이쯤 되면 드라마 제목도 ‘태조 왕건’이 아니라 ‘궁예’로 바꿔야 할 판이다.
이 때문에 김영철은 “열심히 하는 (최)수종이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궁예의 최후는? 역사는 ‘궁예가 보리밭에서 이삭을 주워먹다가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환경 작가는 보다 ‘영웅적인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
궁예가 자결을 하거나 왕건에 의해 화형당하는 안을 놓고 고민 중이다.
sjk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