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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IN&OUT],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다큐

입력 | 2001-01-08 16:59:00


TV의 자연 다큐멘터리를 50분 내내 지켜보는 건 어지간히 참을성이 없으면 힘든 일이다. 시종일관 조용한 화면과 답답할 정도로 느린 카메라의 움직임, 차분하게 가라앉은 나레이션….

허구헌날 현란한 화면과 잠시도 쉬지 않고 쏟아지는 방청객의 웃음소리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그 조용함은 일종의 고문이다. 'TV는 일단 시끄러워야 제 맛인데…'. 그러니 아무리 '몇 달간의 고생 끝에 잡아낸 최초의 장면'이라고 떠들어대도 일단 눈길이 안가는 건 어쩔 수 없다.

방송사에서도 이런 시청자의 심리를 잘 알고 있는지 창사특집이나 공휴일 같은 특정한 계기때 주로 자연 다큐멘터리를 내놓는다. 긴 제작기간에 비해 시청률이 낮으니 대신 '좋은 방송'했다는 평판이라도 얻어보자는 심산인 것 같다. 왜 '자연다큐=좋은 프로그램'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뭐, 자연다큐 중에 나쁜 프로그램은 없었던 것 같으니까.

그래서 SBS에서 신년특집으로 자연 다큐를 한다는 예고를 보고도 '연중행사려니…' 했는데 우연히 그 1편 '문어의 모정'을 보고 뜻밖에 감동받았다.

내가 '문어의 모정'에 채널을 고정한 건 문어라는 동물에 대해 내가 특별한 관심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인어공주'를 괴롭히는 못된 마녀 문어에게 내가 관심을 가질 리가 있나? 단지 문어가 알을 낳아 부화시키고 죽어가는 과정이 우리 인간살이하고 너무 비슷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자기 자식 내버리는 인간들도 늘어난다는데. 도대체 IQ라는 게 있을 것 같지도 않은 문어가 알을 지키겠다고 죽어라 버티는 모습, 부화한 문어알들이 빨리 수면에 도달하도록 죽어라 입김을 불어주는 모습이 정말 뭉클하게 다가왔다. 자식들을 다 부화시킨 후 힘이 빠져 '바다의 포식자'에서 '물고기 밥'으로 전락하는 과정도 꼭 자식 뒷바라지에 젊은 시절 다 보내고 말년을 쓸쓸하게 보내는 인간의 삶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순간 엄마 문어에 감정 이입이 된 내 자신이 좀 웃기기도 했지만 문어의 삶이나 인간의 삶이나 대동소이하다는 사실, 충격적이었다.

2년에 걸쳐 제주바다를 휘저으며 촬영했다는 문어의 짝짓기에서 죽음까지의 과정. 엄마 문어 세 마리를 바우댁, 점순이네, 문순이네로 이름붙인 게 재미있었는데 2년이나 쫓아다녔으면 이름 붙이고도 남을 만큼 정이 들었을 것 같았다. 정성들인 촬영과 아기자기한 설정이 징그러운 문어를 어느새 애틋한 비련의 주인공으로 둔갑시켰다고 할까?

'재미있고 신나는 자연 다큐.' 정말 만나기 힘들다. 자연의 신비로움, 자연의 웅장함, 자연의 경이로움, 누가 모르나? 재미가 없을 뿐이지. 하지만 작은 미물의 삶에서 인간의 삶을 유추할 수 있다면 누가 자연 다큐를 재미없다 하랴? 문어의 짝짓기에서 산란, 죽음까지의 과정을 50분간 지켜보면서 잠시도 딴 생각을 하지 않은 나는 "때론 자연 다큐도 정말 재미있더라"고 말하고 싶다.

조수영 sudatv@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