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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진단]고시1번지 신림9동

입력 | 2001-01-08 19:31:00


#고시생 1

H대 법대 84학번 김정한씨(36·가명).

자명종 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치뜬다.

오전 8시. 책상과 책꽂이, 조그만 비키니 옷장이 가재도구의 전부.

이불을 한쪽 구석에 밀어놓으면 한 몸 움직일 여유도 없다. 베니어판으로 나눈 옆방에선 아직도 코고는 소리가 들린다. 신림동 산동네 고시원.

한 평 남짓한 작은 공간이다. 세 끼 식사를 포함, 한 달에 29만원.

이만큼 싼 곳은 없다.

#고시생 2

서울대 경영학과 93학번 이강혁씨(27).

역시 오전 8시 기상. 방안에 샤워시설과 화장실이 갖춰진 원룸형 고시원.

부모님이 서울에 있지만 작년 7월 전세 4000만원에 방을 얻었다.

대강 씻고 독서실로 향한다.

오후에는 그룹스터디, 밤에는 학원 종합반에 다닌다. 점심과 저녁은 밖에서 사먹는다. 방값, 식비, 학원비, 책값 등을 따져보면 용돈을 빼고도 한 달에 70만원이 훌쩍 넘는다.

생활환경은 달라도 이들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 ‘고시 합격’이다.

한국 법조의 ‘현재’는 법원 검찰청사와 변호사 사무실이 밀집해 있는 서울 서초동에 있다. 하지만 한국 법조의 ‘미래’는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있다. ‘청운(靑雲)의 꿈’을 품고 ‘고시 1번지’인 이곳으로 ‘은둔한’ 고시생이 3만명을 헤아리기 때문이다. 고시의 ‘메카’ 신림9동에는 300개 이상의 고시원이 있지만 요즘도 기존 주택을 헐고 고시원으로 개조하는 공사가 끊이지 않는다.

고시생 수는 97년 2만여명.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이후 1만명이 늘어나 3만여명으로 늘어났다. 번듯하긴 해도 적성에 안맞는 직장을 때려치우고 명예퇴직금을 받아 이곳으로 온 이들도 있다.

고시생 중에는 사법시험 응시자가 2만∼2만2000명으로 가장 많다. 행정고시가 5000∼7000명, 공인회계사(CPA)와 변리사, 기술고시 등이 모두 5000명 가량으로 추정된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고시생들의 주 생활공간은 고시원이었다. 한곳에서 공부하고, 자고, 먹는 ‘삼위일체(三位一體)형’. 그러나 신세대 고시생들은 원룸에서 휴식하고, 독서실로 출근해 공부하고, 식당에서 월식(月食)을 하는 ‘분리형 생활’이 일반화됐다.

자연히 돈은 더 든다. 원룸 월세 35만원 안팎, 월 식비 15만원, 독서실비 10만원에 학원비와 책값, 술값과 오락비를 합쳐 한 달에 100만원은 보통이다.

사법시험 2차에만 올해 여섯번째 도전하는 김모씨(35)는 “처음엔 시골 부모님께서 ‘무슨 돈이 그렇게 많이 드느냐’며 직접 올라와 확인하시기도 했다”며 쓴웃음을 짓는다.

학생 관리형 독서실이라고 해야할 ‘스터디’의 유행도 고시촌의 새 풍속도 중 하나. 종전의 독서실은 고시생 스스로 알아서 자기관리를 해야 했지만 스터디는 90분 공부, 20분 휴식 등 매일 고시생의 생활을 체크해주는 ‘스파르타식’ 독서실이다.

신림9동 한림스터디 박병철실장(37)은 “고시생들 스스로가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고 풀이했다.

여성 고시생들이 부쩍 늘어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신림동 고시촌의 변화. 과거에는 여성전용 고시원에나 들어갈 법했지만 최근 깨끗한 원룸형이 늘어나면서 학습환경이 좋아졌다. 남녀가 함께 쓰는 고시원에선 남자들이 불편해 옮기는 경우도 왕왕 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 것일까. 사법시험에서는 98, 99년에 이어 지난해에도 여성이 수석을 차지하는 등 ‘우먼파워’가 거세다.

news9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