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앞둔 지난해 12월31일. 재정경제부 금융감독위원회 예금보험공사는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이날 2차 공적자금을 받아야 할 한빛, 서울 2개 은행이 노조동의서를 제출하지 않았기 때문. 두 은행 노조는 해질녘이 돼서야 겨우 동의서를 제출했다. 마음 죄던 관계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정부로서는 ‘정책 실패’를 인정하는 치욕의 순간이었다. 1차로 투입했던 8조원이 넘는 공적자금을 감자(減資)로 고스란히 날려버리고 또 다시 7조원의 ‘혈세(血稅)’를 쏟아 부어야 했기 때문이다.
▼ '밑빠진 독' 공적자금 시리즈 ▼
- 국책은행이 나랏돈 주는 꼴
- 부실은행 공적자금 물쓰듯
- 부실기업 "흥청망청"…돈이 샌다
- "망하면 물어주지" 아무데나 선심
- '옥석' 제대로 가려 지원해야
▽한빛은행 왜 실패했나〓작년 12월18일, 완전 감자와 공적자금 투입을 위해 매매거래가 정지된 한빛은행의 주가는 1825원. 액면가(5000원)의 36%에 불과했다. 99년1월 한일 상업은행이 합병해 국내 최대 우량은행을 다짐하며 출범한 뒤 그 해 4월9일 1만4800원까지 상승했던 것과 크게 대조적이었다. 주가로 볼 때 6조5040억원의 1차 공적자금이 투입된 한빛은행은 완전히 실패작이었다.
불과 2년 만에 4조6420억원의 공적자금을 더 수혈받아야 할 정도로 부실화된 원인은 무엇일까. 한빛은행은 외부 탓으로 돌린다.“99년8월 대우그룹이 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예상하지 않았던 부실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우 요인을 빼고 계산하면 경영상태가 좋다는 말인가? 한빛은행의 99년도 충당금 적립 전 이익은 7648억원으로 조흥은행(1조372억원)의 74%에 불과했다. 조흥은행은 자산규모가 한빛은행의 67%에 불과하다.
한빛은행은 공적자금을 받은 대가로 직원의 40%가 줄어들고 임원이 100% 교체되는 등 외형적 구조조정을 이뤄냈지만 한일 상업 은행원간의 화학적 융합이 일어나지 않아 경영정상화를 이뤄내지 못했다(CSFB 은행애널리스트 하선목과장). 지점장 수를 양 은행 출신에게 똑같이 배정하는 등 ‘나눠먹기’식 경영을 했다. 노조위원장도 돌아가면서 하는 실정.
게다가 작년 8월에 1004억원 규모의 관악지점 불법 대출 사건도 일어났다. 도덕적 해이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다른 금융기관도 마찬가지〓한빛은행의 실패 사례는 다른 부실은행에서도 비슷하게 벌어졌다. 경영권을 넘긴 뒤 발생하는 부실채권도 모두 정부가 책임진다는 조건을 따낸 제일은행은 공적자금 투입 규모가 12조5453억원으로 늘어났다. 전문가들은 “어차피 정부가 책임지기로 했기 때문에 제일은행으로서는 부실채권 회수에 적극적으로 나설 만한 유인이 없다”고 지적한다. 서울은행은 동아건설 우방 등 워크아웃 기업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함으로써 1차로 투입된 8조1261억원을 모두 까먹고 2차로 8324억원이나 더 받아야 했다. 평화 광주 경남 제주은행 등 공적자금을 받는 은행 노조는 ‘인력 감축을 못하겠다’며 금융지주회사 설립에 한동안 반발했다.
기업구조조정전문회사인 P&R의 이상묵 대표는 “부실화된 대우그룹에 임원으로 들어가 봤더니 채권은행단과 경영관리단은 간단한 현장답사조차 하지 않아 회생 가능성이 없는 해외공장에까지 공적자금을 낭비하곤 했다”고 비판했다.
채권단의 지지부진한 부실기업 처리도 공적자금 낭비의 한 원인이 됐다. 워크아웃 이후 결국 법정관리로 도중하차한 동아건설 우방 등 5개 업체에 들어간 신규자금만 2조원이 넘는다.
향영리스크컨설팅 이정조대표는 “채권금융기관이 모이면 워낙 여러 얘기가 나오기 때문에 책임감을 갖고 추진하는 세력이 없었다”며 “이 때문에 빨리 죽어야 할 기업을 정리하지 못한 것이 안 써도 될 공적자금을 쓰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금융기관 임직원과 투자자의 주머니로 흘러간 돈〓예금보험공사 이수명 조사2부 팀장은 지난해 10월 파산한 신용협동조합 6곳의 실사를 나갔다가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예보가 파산한 신협 대신 물어준 고객 예금 845억원중 70%가 직원의 횡령에 의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팀장은 “임직원들이 빼돌린 돈을 공적자금으로 메워준 꼴”이라며 “6개 신협에서 이 정도니 전체 1500여개 신협을 조사하면 금융기관 임직원의 도덕적 해이 사례가 부지기수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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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자금 어떻게 투입되나▼
한빛 서울 평화 광주 제주 경남 등 6개 은행은 지난해 12월 30일 단 하루였지만 자본금 5000만원의 ‘미니’ 금융기관으로 전락했다. 공적자금을 받기 위해 완전 감자했으나 노조가 구조조정에 대한 동의서를 내지 않아 공적자금이 투입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적자금 투입을 결정하는 절차는 간단치 않다.
공적자금을 주는 기관은 크게 예금보험공사와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예보는 △증자 △출연 △예금대지급 △자산매입 등으로 지원하며 캠코는 주로 부실 채권을 사준다.
예보가 작년말 6개은행에 공적자금 4조1307억원을 투입할 때 ‘예보채’라는 현물 출자 방식을 택했다. 연 6.91%의 예보 채권을 넘겨주고 대신 지분을 받은 것. 1998년1월 서울과 제일은행에 각각 1조5000억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할 당시에는 7500억원씩은 현찰로, 나머지 절반씩은 정부가 보유한 한국전력과 담배인삼공사 주식을 현물로 출자했다.
주식을 받지 않고 아예 증여하는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부실금융기관을 해외에 매각할 때 예보가 그 손실액을 메워 주는 경우다.
정부가 올 상반기 중 6개 은행에 2조9703억원을 추가 지원하는 것은 ‘부실채권 정리용’이다. 은행의 부실 채권을 싼 값에 사들이는 것이다.
laros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