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두번째 대설주의보가 내려진 9일 오전 명동성당 앞에도 예외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눈발이 굵어지고 있을 즈음 명동성당 들머리계단에는 20여명이 서성이며 하염없이 눈을 맞고 있었다.
이들의 모습을 구경하거나 취재하러온 보도진을 제외하곤 대부분이 우산을 쓰지 않고 눈보라속에 온몸을 내맡겼다.
국가보안법 폐지, 부패방지법 및 인권위원회법 제정 등 3대 개혁입법 처리를 요구하며 지난해 28일부터 노상 단식농성을 벌여왔던 인권운동가들.
폭설과 혹한을 동반했던 지난 13일간의 단식농성기간 동안 4명이 탈진으로 쓰러지고, 10명이 링거액을 맞으면서도 9일 오전까지 농성을 계속해왔다.
그런 인권운동가들이 이날 농성을 접은 것은 임시국회가 폐회됐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 등 3개 단체는 일단 농성을 중단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정부는 국보법 폐지 등을 더 이상 늦추지 말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농성단의 근황을 보고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문정현 신부는 "지난 13일간 농성장은 스케이트장이 되기도 했고 스키장이 되기도 했다"며 20년 만의 폭설과 혹한을 견디며 단식농성을 지속한 인권운동가들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어 YMCA연맹 이남조 총장이 '개혁이 죽어가고 있다’는 제목의 성명서를 낭독할 때는 주변이 숙연해지기도 했다.
이총장은 “IMF를 몰고온 부정부패를 막을 법적장치 하나 만들지 못하고 어떻게 제2건국을 말하겠느냐”면서 “3대 개혁입법이 온전히 처리되지 않을 경우 이 정권에 대한 기대를 버리겠다”고 경고했다.
농성중 쓰러져 병원으로 후송된 박래군 농성단 전상황실장 대신상황실장을 맡았던 최재훈씨는 "이번 임시국회 회기 안에 3대 개혁법안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히고 당론을 확정하라는 요구가 무시되었다"면서 "그러나 농성기간 중에 그랬듯이 밤새 얼어붙은 얼음을 깨는 아침을 맞을 때까지 계속 싸우겠다"고 결연한 의지를 불태웠다.
탈진자 등이 속출했던 이번 농성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킨 사람은 서준식 인권운동사랑방 대표 등 6명. 그중 1명인 이창조 인권운동사랑방 편집장은 이것으로 단식농성이 끝난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이 편집장은 “개혁입법이 처리되지 않는 한 언제든지 농성에 들어갈 것"이라면서 "거리에서 서명운동을 벌이고 2월 임시국회 기간에 다시 단식농성을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농성장에는 최열 환경운동연합 대표, 박원순 참여연대 사무처장 등이 참석해 기자회견을 경청했다.
한편 지난해 31일 김대중대통령은 3대 개혁입법안의 처리를 다짐한 바 있었으나 현재 국회에서 이 법안들에 대한 논의만 무성할 뿐 기약없이 표류하고 있다.
동아닷컴/ 안병률기자mokd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