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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만 폭설 고지대 풍경]게걸음 출근 반찬은 통조림으로

입력 | 2001-01-11 18:40:00

빙판길 연탄 배달


눈, 눈, 눈…. 잇따라 내리는 눈 때문에 시민들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다.

골목길은 쌓인 눈이 그대로 얼어붙어 빙판길이 되는 바람에 시민들이 엉금엉금 기어다니다시피 하고 있다. 그러나 고생과 불평만 있는 것은 아니다. 눈과 관련된 각종 화제가 만발하고 나름대로 낭만도 없지는 않다. 20년 만의 폭설이 바꾼 세상을 들여다본다.

▽시장도 못 가요〓서울 동작구 흑석1동∼3동 일대는 경사 20도 안팎인 고지대 주택가. 김모 할머니(67)는 11일 아침 “7일 새벽 눈이 내린 뒤로 마을버스가 안 다니는 바람에 시장에 못 가 김장김치와 통조림으로 때운다”고 말했다.

이 동네는 요즘 동이 트기도 전인 오전 6시반경부터 출근길을 서두르는 사람들이 빙판 골목길을 게걸음으로 줄지어 내려오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마을 어귀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정모씨(50)는 “하도 미끄러지니까 양복에 운동화를 신고 출근하는 사람도 있다”며 “오늘 아침엔 지푸라기로 신발을 감싸고 내려오는 사람도 만나 박장대소를 했다”고 전했다.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지대에 사는 주부 심모씨(34)는 “가스가 떨어져 주문을 하니 오토바이 배달원이 미끄러져 중상을 입어 도저히 배달이 안된다고 했다”며 울상을 지었다.

서울 구로구 구로동에 있는 구로운수는 평소 여섯대의 차량이 12개 정류장을 오갔으나 요즘은 눈 때문에 7개 정류장만 경유한다. 이 회사측은 “이면도로는 빙판상태여서 정상운행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교차하는 웃음과 울상〓서울 서초구 반포동 김준식정형외과에는 평소 겨울철 골절상 환자가 하루 1명에 불과했으나 요즘은 3∼4명꼴로 늘었다. 김원장은 “골목길에서 미끄러져 오는 환자들 중에는 무릎인대가 끊어진 중환자도 있었다”며 각별한 주의를 요망했다.

한편 소아과에는 쌓인 눈 위에서 뒹굴다 감기에 걸린 어린이 환자들로 북새통이다.

개인택시 운전사 장면수씨(56)는 “신년은 연말과 함께 특수(特需) 시기인데 잦은 눈 때문에 수입이 절반으로 줄었다”고 불평했다. 반면 버스는 차를 두고 나온 시민들로 승객이 크게 늘었다.

눈은 비와 달리 맞아도 좋다는 ‘낭만적’ 생각 때문에 세탁소가 특수를 누리고 있다. 서울 영등포구 양천구 P세탁소 주인 한모씨(40)는 “요 며칠 새 외투를 맡기는 손님이 50%나 늘었다”고 했다.

카페도 호황이다. 신촌의 G카페 종업원 최선경씨(21)는 “눈을 즐기는 연인들 덕에 평소보다 10% 정도 손님이 는 것 같다”고 말했다.

angelhuh@donga.com

▼관청주변 눈치우기 "나몰라라"…민원인들 '꽈당 꽈당'▼

일요일의 폭설 이후 5일째인 11일까지도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이 청사 주변에 쌓인 눈 치우기를 외면해 시민들의 불만을 샀다.

11일 오전 8∼9시 지하철 4호선 연장선인 과천선의 정부과천청사 역에서 쏟아져나온 공무원들은 청사 입구까지 150m거리를 기다시피 걸었다. 일부 여성들은 아예 차도로 내려서 걷기도 한다. 7일부터 내린 눈이 얼어붙어 얼음판이 돼 버렸기 때문. 청사 내부도 주차장은 여전히 빙판이어서 운전자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서울시 일선구청도 청사 앞 일부만 치워놓고 주변 인도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하는 경우가 대부분.

11일 서대문구청에서는 민원인들이 눈길에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종종걸음을 쳤다. 구청 정문 진입로를 뺀 구청 옆 비탈길과 민원인이 많이 오가는 뒷길은 제설작업을 하지 않은 탓. 민원인 오준석씨(40·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는 “구청에 들어오다 3번이나 미끄러졌다”며 ‘얄팍한’ 눈치우기를 꼬집었다.

성북구청도 청사 앞은 보도블록이 드러날 정도로 청소한 반면 청사 옆과 차로 건너편에 수북이 쌓인 눈은 나 몰라라 방치하고 있었다.

수도권 지자체도 상황은 마찬가지. 인천시청은 청사 안 주차장의 눈을 제대로 치우지 않아 민원인들이 큰 불편을 겪었고 경기 고양시청도 정문 앞은 말끔히 치운 반면 청사에 가려 그늘진 뒤편의 눈은 외면했다.

반면 대형빌딩에 입주한 일부 기업체의 경우 조직적으로 직원과 장비를 동원해 건물 주변과 일대의 눈을 깨끗이 치워 대조를 보였다.

그랜드 코엑스 인터컨티넨탈호텔과 현대백화점 공항터미널은 각각 정문 출입구 주차장 진입로 측면 후면 등으로 구역을 나눠 직원들을 동원해 아침 일찍 눈을 치웠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몰 관리팀 김종혁 과장은 “눈이 오는 날은 밤마다 제설차를 불러 눈이 쌓이지 않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