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과 저주의 정치사상:20세기와 한나 아렌트/김비환 지음/394쪽 2만원/한길사
새 밀레니엄의 서막을 알리던 지난해 초, 동아일보에서 새 시대를 열어갈 사상가들을 차례로 소개할 때, 그 첫 인물이 아렌트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후 만 일년이 지난 2001년 벽두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아렌트 소개서가 국내인의 손으로 집필돼 나온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유대인 여성 망명객이라는 삼중의 ‘주변인(패리아)’으로서의 독특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 이 시각에서 아렌트는 정치가 저주가 될 것인지 축복이 될 것인지가 시민의 의식과 공적 생활에의 참여에 달려 있음을 보여준다.
아렌트 정치사상의 바른 이해는 그의 정치 개념을 정확히 이해해야만 가능하다는 저자의 주장은 전적으로 공감할 만하다. 아렌트는 정치를 인간의 다양성에 근거한 것으로 보며 인류 번영을 위해 필수적인, 인간적 삶의 조건으로 이해한다.
그의 사상은 개인과 공동체라는 두 축을 동시에 이용하면서, 왜 그리고 어떻게 현대인들이 소비에만 몰입한 삶에서 벗어나 정치공동체와 공적 문제에 대해 참여해야 하는지를 제시해 주고 있다.
아렌트의 원전을 접해본 사람은 한결같이 그 통찰의 깊이와 영감의 탁월성에 감탄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 깊은 사상은 녹녹히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아렌트의 주요 저작들과 많은 2차 문헌들을 잘 소화해 낸 이 책은 그의 전체주의 비판 내용들, 인간 조건의 여러 차원들에 대한 이해, 그리고 참된 혁명의 길과 진정한 권력이 무엇인가에 대한 숙고 등을 잘 정리해 제시한다. 이를 바탕으로 작금의 경제지상주의와 현대 민주주의 사상과 연관해 저자가 정치 사상의 지향점으로 제시하는 부분도 주목할 대목이다.
가뭄에 단비 같은 이 저술을 기초로 해서 우리는 아이히만의 재판과 관련된 악의 일상성 문제, 그의 후기의 정치적 판단이론 등과 같은 다른 주제에 대한 연구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번역 중으로 알려진 많은 아렌트의 주요 저술들과 새로운 시각의 연구서들이 속히 쏟아져 나와 활발한 아렌트 연구의 기초를 다져주길 바란다.
김선욱(철학박사·숭실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