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쓰는 낱말만 보면 김대중 대통령과 이회창 한나라당총재는 닮았다. 정치판이 날씨만큼 꽁꽁 얼어붙은 요즘 특히 그렇다. 두 사람은 입이라도 맞춘 듯 ‘원칙’을 앞세운다.
김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에서 “야당과 잘 지내고 싶은데 여기엔 원칙이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와 법치가 원칙이다”고 말했다. 이총재 역시 일련의 신문 인터뷰에서 “정의로운 목표를 위해 원칙을 관철해야 한다. 원칙대로 대처하겠다”고 강조했다.
이 글을 통해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사실 이게 다다. 두 사람의 ‘원칙 신봉자’가 맞서 정초부터 국민을 한없이 불안하게 하고 있다. 도대체 원칙이 뭐기에 이처럼 국민의 속을 뒤집고 흔드느냐는 불만도 가득하다.
▼'의원꿔주기' 논리 국민 경악▼
따져보면 두 사람이 말하는 원칙이란 게 다를 것도 없다. 민주주의, 법치, 정의, 화합, 상생, 공동선 등 모두에게 좋은 것을 실현해 나가자는 것이다. 목표가 같다. 거기에 이르는 과정도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상대를 죽일 듯이 싸운다.
이러니 순진한 사람들은 헷갈린다. ‘정말 두 사람이 내세우는 원칙이란 뭔가. 말 그대로 원칙대로만 하면 안될 게 뭐가 있나….’ 그런데 이건 정말 순진한 사람들의 생각이다. 알만한 국민은 다 알고 있다. 국민이야 어찌 되든 안중에 없고 상대를 굴복시켜 정치를 자기 맘대로 이끌어 가고 싶은 것이 그들의 원칙이라는 것을.
일련의 사태를 짚어보면 그게 분명해진다. 우선 대통령측부터 보자. 세상에 전례없는 의원 꿔주기로 국민들의 비난이 자자한데도 서슴없이 2차 꿔주기를 감행해 자민련을 교섭단체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면서 “정치가 안정돼야 경제가 회복되고 자민련과 공조해야 정치가 안정된다”고 강변한다. 게다가 “여론을 최고로 두려워하는 정부가 되겠다”고 한다. 원내 다수당인 한나라당의 발목잡기로 정치가 불안하다고 생각해온 국민들도 경악할 주장이다.
여론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치, 국민이 구성해준 국회를 자기 입맛에 맞게 휘젓는 정치를 민주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법정신과 동떨어졌으니 법치라고 할 수도 없다. “민주주의와 법치가 원칙”이라는 말을 안한다면 모를까,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얘기를 대통령측은 하고 있다. 이러고도 국민의 믿음을 바탕으로 국정을 이끌어간다니 민심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이다.
이총재측도 그렇다. 안기부 돈의 구여권 선거자금 유입사건은 정의를 땅에 내동댕이친 사건이다. 야당총재가 수사중단을 요구한다고 눈감아줄 사안이 절대 아니다. 국민세금으로 조성한 국가예산을 특정정당의 선거자금으로 쓴 부정 비리를 파헤치자는 데 야당은 어쭙잖게 정의를 들먹이며 그걸 하지 말라고 아우성이다. 불법적으로 부정한 돈을 끌어와 멋대로 나눠준 사람을 불러 조사하려는 것조차 방해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문제의 돈이 안기부 예산이 아닌 정치자금이라며 수사에 응하지 않겠다고 주장한다. 이건 도대체 무슨 얘긴가. 정치자금이라면 국가 예산에 숨겨놓았다 돈세탁을 해 특정정당이 선거 때 나눠 써도 좋다는 주장인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조사조차 못하게 하며 관련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탄국회를 보아란 듯이 열 수 있는가. 그러고도 ‘법대로’, ‘원칙대로’를 주문처럼 외니 국민이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다.
▼안기부돈 사건 '법대로' 실종▼
원칙이란 어떤 행동이나 이론에서 일관되게 지켜야하는 기본적 규칙, 법칙이다. 김대통령이나 이총재가 요즘 하는 말과 행동을 보면 원칙이란 단어의 이런 사전적 의미조차 모르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정치인이 지켜야할 최고의 원칙은 나라와 국민 전체의 이익, 안정을 추구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는 점을 그들은 잊고 있다.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야당이 부정하고, 국민이 선택한 원내 제1당을 대통령이 배척하는 행위는 결단코 정치가 아니다. 정치인이나 정당이 내세우는 어떤 원칙도 국민의 의사 위에 존재할 수 없다. 다수 국민이 “의원 꿔주기는 민주주의가 아니다”고 하면 그를 존중해야 하고 “안기부 돈사건은 정쟁이 아닌 철저한 수사대상이다”고 판정하면 그에 순응해야 한다.
국민이 공감하는 원칙 대신 정치인들이 자기 잣대로 만든 원칙만 강요하는 나라에 미래가 있을까. 없다.
민병욱min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