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임의 고통에 시달리던 부부가 임신에 성공했지만 출산 전에 검사를 해본 결과 뇌가 없는 선천적 기형아로 밝혀졌다면 당신의 선택은? 태어날 아기를 위해 며칠밤을 새며 방 전체를 장난감 레고로 꾸며놓았던 남편은 눈물을 머금고 낙태를 결심한다. 그러나 뱃속의 아기를 위해 매일 일기를 써온 아내는 아기의 생명을 빼앗는 것에 온몸으로 저항한다.
영화 ‘하루’의 질문은 매우 도발적이다. 환경 호르몬 때문이든 전자파 때문이든 갈수록 불임부부와 기형아가 늘어가는 현실에서 그 질문은 결코 가벼이 넘길 수만은 없다. 얼핏보기에 이 영화는 낙태의 비도덕성을 고발하는 생명주의 영화나 출산의 선택권이 여성에게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한 페미니즘 영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감독은 모성애의 강인함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한지승 감독은 이 영화에서 불임 부부의 아기를 갖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과 어렵사리 임신한 아이가 기형아라는 진단을 받은 부모의 애타는 심정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단 하루밖에 살 수 없는 아기에 대한 모성애도 잘 드러나 있다.
영화속 여주인공 진원(고소영)은 부모를 일찍 여의고 이모 밑에서 자란 외톨이다. 그래서 자신이 상처받는 것을 못견디는 만큼 주변 사람들의 마음도 잘 할퀸다. 불임의 허물을 자신이 뒤집어쓰고 입양을 권하는 남편 석윤(이성재)에게 오히려 “내가 왜 남의 불행까지 떠안아야 하느냐”고 따지고, 자신을 키우기 위해 시집도 안간 이모(윤소정)에겐 “아기도 못 낳아본 여자가 뭘 아느냐”고 쏘아붙인다.
그러나 단 하루를 위한 9개월의 기다림은 그런 진원을 서서히 변모시킨다. 아기를 떠나보내는 순간 아이의 장기 기증을 통해 더 큰 사랑을 실천하는 그녀의 모습은 ‘모성애는 모든 사랑의 수원지’라는 주제를 뚜렷이 부각시킨다.
▲ 관련기사
[씨네리뷰] 두 남녀의 예쁘고도 슬픈 하루
그런 의미에서 가시 돋힌 장미같은 이미지의 고소영을 진원역에 캐스팅한 것은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태어난지 얼마안된 아기를 떠나보내야하는 모성의 억제된 슬픔을 표현하기엔 아직은 서툴러 보인다. 반면 그런 아내 곁을 따뜻하게 지켜주는 석윤역의 이성재의 연기는 탄탄하다.
미당 서정주가 눈내리는 날 운명하리라는 것을 예감이라도 한 것일까. 지난해 여름 곽지균감독의 ‘청춘’에서 젊음의 열정을 다스리는 주문처럼 등장했던 미당의 시 ‘내리는 눈발속에서는’이 이 영화에서 다시 애끓는 모정을 다독이는 극적 장치로 등장하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20일 개봉. 15세이상.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