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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찬의 문화비평]백설이 가만히 속삭이길 …

입력 | 2001-01-16 19:07:00


오랫만에 찾아온 강추위 속에서도 수십 년만의 폭설이 밉지만은 않다. 눈의 매력은 세상의 온갖 잡념과 분별심을 하얗게 덮어 버린다는 것이다.

자기 편견의 그물로 세상을 재단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들은 이 하얀 세상의 두루뭉실함에 불편함을 느끼기도 하겠지만, 색깔과 형체마저 소리없이 덮어버리는 이 속편한 광경을 바라보는 기쁨도 작지 않다. 어느 시인은 온갖 차별상을 차분히 덮어버린 이 광경을 보며 깨달음에 이른 마음에 비유하기도 한다.

하지만 하얀 세상을 보는 시선이 다 같은 것은 아니다. 흰색 가득한 세상을 바라보며 눈이 감싸안는 산마을의 포근함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길 잃을 걱정이 앞서는 사람도 있다.

프랑스의 현대사상가 레지 드브레는 저서 ‘이미지의 삶과 죽음’에서 이미지에 멈추는 시선과 그 이미지를 생산하는 지배적 메커니즘을 파헤치는 작업에 독자들을 초대하며 한 중국 황제의 일화를 소개한다.

황제는 궁정 수석 화가에게 그가 궁궐에 그렸던 아름다운 벽화를 지워버리라고 명령한다. 이유는 벽화 속의 물소리가 잠을 설치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 황제는 벽화에서 물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조선시대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배 위에 앉아 배를 통째로 집어삼킬 듯 거친 열하를 건너며 감각기관의 방해를 받지 않고 열하를 관조했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당시 조선의 보수적 가치관에 숨막혀 하던 그는 편견과 선입견으로 왜곡된 감각기관에 의존하지 말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고 주장한 것이다.

논리적 인간은 자기 인식의 그물로 세상을 걸러내 기호화하지만, 다른 한편 그 그물로 잡히지 않는 영역에 대한 무모한 도전을 계속한다. 평범한 인간의 인식이 드브레가 말하는 사회의 지배적 메커니즘을 벗어나 박지원의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빈부와 귀천과 청탁(淸濁)마저 덮어버린 하얀 세상은 적어도 조급한 이해관계를 자극하는 분별상을 가리고, 잠시나마 순수한 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 여백의 공간을 열어준다.

어느 해 12월초 기말시험준비를 하러 아침 일찍 도서관에 나왔던 학생들은 갑자기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을 맞으러 밖으로 나왔다가 캠퍼스 대운동장에 벌어진 한 녀석의 경건한 퍼포먼스를 보며 스탠드에 멈춰 섰다.

거의 한 시간이나 계속된 작업 끝에 그는 하얗게 눈 덮인 대운동장 가득히 ‘I LOVE YOU 소라’를 반듯하게 그려 놓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과대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떠나는 그를 향해 박수갈채를 보내던 수백 명의 관중은 그가 떠난 운동장으로 내려가 그의 글씨 옆에 각자 자신들의 작은 사랑을 새기기 시작했다.

그 후 매년 함박눈이 오는 날이면 대운동장에는 사랑을 고백하는 글씨가 쓰여졌지만 그가 썼던 것만큼 완벽하게 대운동장을 감동시키는 작품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파도와 물소리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열하를 건널 수 있는 ‘사랑’은 많지 않았던 모양이다.

kh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