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황의 전쟁 책임
가토 노리히로 외 지음 고미치쇼보 간행
일본의 내셔널리즘 문제를 파고 들어가다 보면 반드시 부딪치게 되는 것이 천황제(天皇制)이다. 그런데 이 천황제는 밖에서는 좀처럼 알 수 없는, 젖빛 유리창 속의 풍경과 같다. 현행 일본 헌법에 천황은 일체의 정치 행위가 금지되어 있고, ‘국민통합의 상징’이라는 역할만을 담당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것이 이른바 ‘상징 천황제’의 핵심이다. 전전(戰前)의 대일본제국 헌법에서의 천황이 ‘신성불가침’한 국가주권의 담당자였던 것과 비교하면 천황제의 위치는 크게 변했음을 알 수 있다.
천황제는 외국인에게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이는 아마 천황제가 정치제도만으로는 담을 수 없는 일본 특유의 독특한 정신 풍토를 만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쇼와(昭和) 천황이 세상을 떴을 때 보여 주었던 일본 전체의 분위기는 이러한 사정을 말해 주고도 남음이 있다. 당시 일본 열도 전체는, 관청의 명령이 있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발적으로’ 번화가의 네온사인을 끄고 학교 운동회를 중지하는 등 상(喪)을 철저히 지켰다. 뿐만 아니라, 천황에게 전쟁 책임이 있다고 단언했던 나가사키(長崎) 시장이 우익에게 저격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지난해 말에 출판된 가토 노리히로(加藤典洋) 하지즈메 다이자부로(橋爪大三郞) 다케다 세지(竹田靑嗣)의 대담집인 ‘천황의 전쟁 책임’은 천황제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 자체가 그 틀이 대단히 경직되어 있다고 비판하면서, 새로운 시각에서 천황제를 논의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전후에 태어났고, 일본의 논단에서 매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평론가들이다. 이들에 의하면 지금까지의 천황제에 대한 논의는 보수파 대 진보파라는 정치적 대립을 그대로 베낀 것이므로, 이젠 이러한 이항 대립의 사고에서 탈피해야 한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 천황제가 오리무중에 빠지고 만다. 하시즈메는 천황의 전쟁 책임을 법적으로 추궁할 수는 없으나,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의심할 여지없는 침략이었다고 말한다. 가토는 무엇보다도 천황은 전쟁에서 죽은 일본 전몰자들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하고, 다케다는 천황제에 찬성인가 반대인가를 묻는 사고틀 자체를 무효로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들 세 사람이 전후 일본의 지배적인 담론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든 알겠는데, 문제는 논의 자체가 너무나 어수선하다는 점이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이러한 책이 출간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천황제에 대한 인식의 혼란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혼란의 중요한 원인은 일본 밖의 시선을 완전히 차단한 데 있다.
세계화에 대한 무절제한 예찬은 많은 중요한 문제를 은폐하고 약한 자를 소외시킬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천황제에 대한 논의만큼은 충분히 세계화의 바람을 쐴 필요가 있음을,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이연숙(히토츠바시대 교수·언어학)